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철원최씨(鐵原崔氏)동주최씨(東州崔氏),최준옹(崔俊邕),최영(崔瑩)

작성일 : 2017-05-24 15:19 수정일 : 2019-11-12 13:4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동주최씨(東州崔氏)의 시조(始祖) 최준옹(崔俊邕)은 득성시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 후손들은 동주(東州)를 관향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동주(東州)는 철원(鐵原)의 옛 이름으로 강원도 북서부, 영서지방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의 철원(鐵原)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군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때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로 고쳤고,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鍊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이를 없애고, 1018년(현종 9)에 지동주사(知東州事)를 두었다가 고종(高宗)때 강등하여 현령(縣令)을 두었다.

그 후 승격하여 목(牧)이 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철원부(鐵原府)가 되었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철원군으로 고쳤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경기도 삭녕군(朔寧郡)의 내문(乃門)․인목(寅目)․마장(馬場)의 3개면을 병합하고, 동변과 송내를 합하여 동송읍으로 하였으며, 1931년에 서변면이 철원읍(鐵原邑)으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 준옹(俊邕)의 증손인 석(奭)은 1051년(문종 5)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려의 최고 중앙정치기관인 좌습유(左拾遺)를 시작으로 1075년(문종 29)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어 4월 요(堯)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 뒤 돌아와 전중감(殿中監)․지어사대사(知御史臺史)가 되었고 그 후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한 후 1087년(선종 4)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최유선(崔惟善)․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석(奭)은 나이 70세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당대의 문장가 유청(惟淸)이다. 유청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經)과 사(史)․자(子)․집(集)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예종(睿宗)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학문이 넉넉하게 된 뒤라야 벼슬에 오르겠다”하며 두문불출하고 오직 글만 읽었다. 주위에서 벼슬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곧 “학문이 아직성취되지 않았읍니다”하며 굳이 사양하였고 오랜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 갔으나 인종(仁宗)초에 주위의 간계로 물러나 있다가 1132년(인종 10)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금나라에도 다녀왔으며 경인난(庚寅亂) 및 계사(癸巳)의 난(亂)에 문신(文臣)들이 모두 해(害)를 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그의 덕망에 경복(敬服)하였으므로 친척들과 함께 모두 화를 면했다. 왕이 즉위하자 숙덕(淑德)으로 다시 재상에 올랐고 그가 집필한 저서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와 「유문사실(柳文事實)」을 왕이 보고 칭찬하여 판목(版木)에 새겨 전하였다.

1161년(의종 15) 중서시랑 평장사에 올랐고 1172년(명종 2) 수사공․집현전 대학사․판예부사로 치사(致仕)하였다. 그는 독자(獨子)로 태어났으나 슬하에 8남 2녀를 낳아 이로부터 가문이 번창하였다.

당(讜)은 유청(惟淸)의 넷째 아들로 글을 잘 짓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며 명성과 공적을 남겨 명망이 한 시대에 두터웠다. 1197년(명종 27․신종 원년) 신종(神宗)의 이름을 탁(晫)으로 지어 올렸고, 1199년(신종 2)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하여 아수 선(詵)과 장자목(張自牧)․이준창(李俊昌)․백광신(白光臣)․현덕수(玄德守)․등과 더불어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한가로이 즐기며 시주(詩酒)로 소일하니 그 때 사람들이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 하였다.

당의 동생 선(詵)은 문학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욕심이 없어 깨끗하고 말이 적으며 선비에게 자기 몸을 낮추어 어진이를 예(禮)로써 대우하니 왕은 참지정사(參知政事)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후 늙음으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났다.

선의 아들 종준(宗峻)과 종자(宗자)도 당대에 뛰어난 인물(人物)이었다. 종준(宗峻)은 1201년(신종 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 초에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이부 상서(吏部尙書)등을 역임하고 뒤에 문하시중에 이르러 궤장을 하사 받았으며, 특히 의학에 정통하여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을 저술했다. 종준의 동생 종자(宗자)도 1225년(고종 12) 위위경(衛慰卿)으로 과거시험의 감독관을거쳐 1236년(고종 23)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당(讜)의 손자 인(璘)은 성격이 호탕하여 술과 놀이를 좋아했으며 30세에 독서를 시작한 뒤 강종 때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지내고 여러 차례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적으로 공을 쌓았고 인의 아우 징(澄)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징(澄)의 아들 유(濡)는 1090년(선종 7)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교감(敎書校勘)․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111년(예종 6) 시어사가 되었고 1128년(인종 6) 이부상서(吏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1138년(인종 16)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종자(宗자)의 아들 온(昷)은 유청(惟淸)의 증손으로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1258(고종 45)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권신 최 의(崔 竩)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김 준(金俊)등과 참여하였다. 한 때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장군 이주인(李柱仁)의 청으로 풀려 나와 1260년(원종 1) 추밀원사에 복직하고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거쳐 1262년(원종 3) 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낸 후 수태부 중서시랑 평장사로 치사(致仕)했다.

옹(雍)은 유청(惟淸)의 증손이며 정소(貞紹)의 아들로,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관승(大官丞)을 거쳐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이 태손(太孫) 때 그 스승이 되었고, 1280년(충렬왕 6) 정랑(正郞)으로서 경사 교수(經史敎授)를 겸임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292년(충렬왕 13) 부지밀직사사․문한학사(文翰學士)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문신(文臣)들의 권세가 압도적인 비중으로 흘러온 시대에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대표적인 인물은 고려조의 명장이고 충신인 영(瑩)이다. 영은 유청(惟淸)의 현손(玄孫) 원직(元直)의 아들로 태어나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번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호군(護軍)에 임명되면서부터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그 때부터 무예와 용기가 뛰어난 것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원나라의 요청으로 류 탁(柳濯)등과 함께 중국이 고우(高郵)․사주(四州)등지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평하고 돌아와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 세력을 용감히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데 큰 영양이 미치도록 하였다.

1358년(공민왕 7) 오예포(五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시켰고, 1359년(공민왕 8)에는 중국의 홍건적 4만 명이 서경(西京)을 침범하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그 공을 일등도형벽상공신(一等圖形壁上功臣)이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의 벼슬을 받았다. 그 외 수많은 국내외(國內外) 침입과 반란이 있을 때마다 격퇴․평정하여 고려이 시련을 극복하였다. 그는 성품이 굳세고 충성되었으며 전장에 임하여 적을 대하였을 때에도 그 정신과 의기가 안정되어 있었으며 화살과 포탄이 좌우로 날아와도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다.

군사를 다루는 데도 엄격하여 군사가 싸움 마당에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면 당장에 군법을 시행한 까닭으로 크고 작은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죽음에 임하여 “너는 꼭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하는 말을 경계하여 말했는데,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하여 기쁜 마음과 정성(精誠)스러운 태도로 일하며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아 의복과 음식은 검약(儉約)하고 소박(素朴)하였으며 때로는 끼니가 떨어지는 일까지 있었다.

비록 신분이 장상(將上)의 최고 지위에 있었고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비굴한 행위를 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청렴결백한 뜻에 감복하였다. 옳지 못한 행위를 보면 통렬히 배척하였으며 강인한 성품 탓으로 주위의 모함을 받아 한 때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고 억울하게 귀양가기도 했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왕위(王位)를 폐하고 정몽주(鄭夢周)등과 함께 충신들을 참형(斬刑)하니 5백년 고려 사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로 죽음에 임하여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내가 평생에 탐욕한 마음을 가졌다면 내 무덤위에 풀이 날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뒤에 그의 무덤 위에는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하였고, 그가 죽는 날 개경(開京)을 비롯하여 전죽 백성들은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충신들이 정의(正義)의 이상을 위하여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려 어려운 고비를 넘겨 왔으나 진정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의 빛나는 업적과 충절(忠節)은 우리 민족의 얼이요, 동주 최씨(東州崔氏) 후손들의 핏줄기 속에 용솟음칠 영원불멸의 수호신이 되었다.

동주최씨는 무민공(武愍公) 영(塋)이 죽은 후로 후손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심산벽지(深山壁紙)로 피신하며 생활하다가 이조 중엽에 회복되어 다시 평등한 인권을 되찾았으나 조선 초 수십년 동안 동주(東州)의 사적은 변조되고 소멸되었으며 더욱이 왜정 36년간에는 최 영 장군의 사적이 삭제되었으니 후손들은 무척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영(塋)의 후대에서는 그의 아들 담(潭)이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손자 언(彦)은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언(彦)의 후손인 충국(忠國)․양진(良振) 두 부자(父子)가 함께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명문의 대(代)를 이었고 근대에 와서 국학자 육당(六堂) 남선(南善)이 가문의 중흥(中興)을 이룩했다.

남선은 독학으로 국문을 깨우치고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글을 투고하였으며 1908년 자택에 「신문관」을 설립하여 잡지 「소년」을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2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듬해 가출옥했다.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는 한편 국사연구에 전심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1938년 만주 신경(新京)에 가서 ”만몽일보(滿夢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귀국 후 1943년에 재일(在日) 조선유학생의 학병(學兵) 지원 권고 강연차 이광수(李光洙)․김연수(金秊洙)․이성근(李聖根)등과 같이 동경에 건너갔다.

해방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하며 역사논문(歷史論文) 집필에 전심하다가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기소,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나와 6․25 때 해군전사 편찬위원회 촉탁을 지냈고 서울 시사 편찬위원회(市史編纂委員會)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저서(著書)에는「백팔번뇌」․「시조유취」․「금강예찬」․「조선역사」․「고사통」․「조선상식」․「조선독립운동사」․「단군론」․「백두산 관참기」등 다수를 남겼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했고 신문학운동과 국학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동생 두선(斗善)은 서울 중앙중학교 교장․보전상무(普專常務)를 거쳐 1945년 경방사장(京紡社長)을 역임하였고, 1947년 도아일보사장(東亞日報社長)으로 언론계에 몸담았다가 대한적십자사 총재(1960~1961)․국무총리(1963~1964)를 비롯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971년 한국장학재단 이사를 지냈다. 국가로부터 청조소성훈장(靑條素星勳章)․국민훈장무궁화장(國民勳章無窮花章)을 수상했고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도 받았다.


인 구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주․철원 최씨(東州․鐵原崔氏)는 남한에 총 2,518가구 10,5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전국에 철원최씨 11,403명 동주최씨 3,64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

최석(崔 奭) 초명은 석(錫), 시호는 예숙(譽肅). 1051년(문종 5) 문과(文科)에 장원, 좌습유(左拾遺)를 지내고, 1075년 형부 시랑(刑部侍 郞)때 사신으로 요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 뒤 돌아와서 전중감(殿中監)․지어사대사(知御使臺事)가 되고, 이듬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올랐다.

1080년 동번(東蕃)의 난이 일어나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로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를 진압하고, 이듬해 이부 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에 전직,1082년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1083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1086년(선종 3)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고, 수태위(守太慰)․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최유선(崔惟善) 이정공(李靖恭)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최유청(崔惟淸) 1095(헌종 1)~1174(명종 4) 자(字)는 직재(直哉), 諡號는 문숙(文淑), 공신 준옹(俊邕)의 후손, 석 (奭)의 아들. 예종(睿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 초에 이자겸(李資謙)의 간계로 파직, 이자겸 몰락 후 내시(內侍)에 속했다가 1132년(인종 10)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14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금나라에 가서 책명(冊名)을 사(謝)하고 돌아와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1149년(의종 3)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가 되었고, 이듬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1151년 판병부사(判兵部思)를 겸직했다.

1161년(의종 15)봉원전 대학사(奉元殿大學士)에 이어 다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고, 1172년(명종 2) 수사공(守司空)․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로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불경(佛經)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도 잘썼다.

최당(崔 讜) 1134(인종 13)~1211(희종 7) 시호(諡號)는 정안(靖安),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아들. 1171년(명종 1)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상서 좌승(尙書左丞)․참지정사(參知政事)․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등을 역임하고 신종(神宗)때에 수태위(守太慰)․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장자목(張自牧)․백광신(白光臣)․현덕수(玄德守)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조직, 시주(詩酒)로서 소일하여 지상선(地上仙)이라 불렀다.

최선(崔 詵) ?~1209(희종 5) 시호(諡號)는 문의(文懿),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아들. 1178(명종 8) 공부 낭중(工部郎中)으로 흥화도 찰방사(興化島察訪使)를 겸한 뒤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1186년 판장작감(判將作監)이 되고, 1192년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정국검(鄭國儉)등과 함께「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을 교정하고, 또「태평어람(太平御覽)」을 교정․간행, 1196년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신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1200년(신종 3) 수태부(守泰 傅)․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에 특진, 이듬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상주국(上柱國)이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희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최신윤(崔臣胤) 고려(高麗)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은청광록대부 (銀靑光錄大夫)로 이부 상서를 역임했다.

최종준(崔宗峻) ?~1246(고종 33) 시호(諡號)는 선숙(宣潚),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손자, 평장사 선(詵)의 아들. 1201년(신종 4)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고종(高宗)초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 . 1228년(고종 15)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이부 상서(吏部上書)를 역임하고, 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1242년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의학(醫學)에 밝았다.

최종자(崔宗榟) 평장사(平章事) 선(詵)의 아들. 1225년(고종 12) 위위경(衛慰卿)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1229년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거쳐 1236년(고종 23)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최인(崔 璘) ?~1256(고종 43)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평장사(平章事) 당(讜)의 손자, 30세에 독서를 시작한 뒤 강종(康宗)때 문과(文科)에 급제, 대간(臺諫)을 지내고 1237년(고종 24) 나주 부사(羅州副使)가 되어 지휘사(指揮使)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난을 평정한공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1241년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몽고(蒙古)에 볼모로 가는 영녕공(永寧公) 준(綧)을 수행했고, 1254년(고종 41)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몽고 장수 차리다이(車羅大)가 주둔한 합주 단계현(陜州丹溪縣)에가서 철병을 청하고 사신으로 몽고에 가서 화친에 힘썼으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최징(崔 澄)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최영(崔 英) 1255년(고종 42)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승천성(昇川城)에 침입한 몽고병(蒙古兵)들을 물리쳤고, 좌우복야(左右僕射)․지추밀원사(知樞密院使)등을 거쳐 어사대부(御使大夫)․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최온(崔 昷) ?~1268(원종 9) 시호(諡號)는 문신(文信),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증손, 좌복야(左僕射) 종자(宗榟)의 아들. 고종(高宗)때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258년(고종 45)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올랐다. 1260(원종 1)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를 거쳐 1262년 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내고, 수태부(守太部)․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최평(崔 坪) 1202(신종 5)~1256(고종 43) 평장사(平章事) 선(詵)의 손자. 고종(高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형부 시랑(f刑部侍郞)을 거쳐 124년(고종 41)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서 기근의 구제에 힘썼다.

최옹(崔 邕) ?~1292(충렬왕 18) 초명은 기(夔), 자는 대화(大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유청(惟淸)의 증손. 고종(高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태관승(大官丞)을 거쳐 전리 좌랑(典理佐郞)이 되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이 태손(太孫)때 그 스승이 되었고, 1280년(충렬왕 6) 정랑(正郞)으로서 경사 교수(經史敎授)를 겸임했다. 1286년 국자 사업(國子司業)․국학전주(國學典酒)․세자궁령(世子宮令)을 거쳐 12 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문한학사(文翰學士)에 올라 치사했다.

최유(崔 濡) 초명(初名)은 충(沖), 시호(諡號)는 영민(榮敏). 고려조에 소실성수절광보공신(紹室誠守節匡輔功臣)에 오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다.

최문본(崔文本) 고려(高麗)때 판도판서(版圖判書)․밀직부사(密直副使)등을 지냈다.

최문립(崔文立) 고려(高麗)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삼사사(判三司使)를 역임하였다.

최원직(崔元直) 최 영(崔 塋) 장군의 아버지.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유명(有名)하였으며 임종(臨終)때 아들 영(瑩)에게 “너는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여겨라”고 유훈(遺訓)하였다. 삼한벽상 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판문하부사(判文河府使) 판예문춘추관사(判藝文春秋館事)에 추증되었고,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최운(崔 雲) 1236 (고종 23)~1325(충숙왕 12) 자(字)는 몽수(蒙叟), 봉익대부(奉翊大夫) 문립(文立)의 아들. 15세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도재고 판관(都齋庫判官)을 거쳐 내시(內侍)에 소속된 후 전리 총랑(典理摠郞)․판사영서사(判司盈暑事)를 역임했다.

이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우상시(右常侍)․상호군( 上護軍)에 이르러 병사했다.불교를 독신했다.

최방계(崔芳啓) 고려(高麗)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진현관 대제학(進賢冠大提學)․상호군(上護軍)등을 역임하였다.

최영(崔 塋) 1316(충숙왕 3)~1388(우왕 14) 시호(諡號)는 무민(武愍), 수사공(守司空) 유청(惟淸)의 5세손,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 원직(元直)의 아들. 양광도 도순문사(樣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수차 왜구(倭寇)를 토벌해 공을 세우고 1352년(공민왕 1) 안 우(安 祐)등과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이해 원나라의 요청으로 류 탁(柳濯)등과 함께 중국의 고우(高郵)․사주(四州)등지에서 장사성(張士城)의 난군을 토평하고 이듬해 귀국, 서북면 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鴨綠江) 서쪽의 8참(站)을 수복했다.

대장군(大將軍) 겸 동북면 체복사(東北面體覆使)를 거쳐 1358년 양광․전라도 왜적(倭賊) 체복사(體覆使)로 오예포(吾乂捕)에 침입한 왜구의 배 4백여 척을 격파한 뒤 1359년 홍건적(紅巾賊) 4만이 서경(西京 : 평양)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평양윤 겸 서북면 순문사(平壤尹 兼 西北面 巡問使)에 이어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 都巡察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내고,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창궐하여 개경(開京)까지 점령하자 이방실․안 우(安 祐)등과 이를 격퇴하여 수도를 수복한 공으로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으며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여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승진한 뒤 평리(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 유(崔 濡)가 덕흥군(德興軍)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 1만으로 쳐들어오자, 서북면 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가되어 이성계(李成桂)등과 이들을 의주(義州)에서 섬멸, 그 공으로 말과 은(銀)을 하사받고, 이어 박백야(朴伯也)가 연주(燃州)에 침입하자 부하 장수를 보내어 격퇴시킨 뒤, 왕이 국청사(國淸寺)에서 부는 개선주연(凱旋酒宴)을 받았다.

다음해 동서강 도지휘사(東西江 都指揮使)로 강화(江華)에 쳐들어온 왜구와 싸우던 중 신 돈(申 旽)의 모함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 이어 훈작(勳爵)을 삭탈(削奪)당했으며, 1371년 신 돈이 처형당하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보직되었고, 1373년 육도 도순찰사(六道道巡察使)․출척장수(黜陟將帥), 다음해에 경상․전라․양광도 도순문사(慶尙 全羅 楊廣道 都巡問使)를 역임하고 정난공신(定亂功臣)의 호를받았다.

이어 제주(濟州)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 全羅 慶尙道都統使)로 난을 평정하고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승진, 1376년(우왕 2)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元帥) 박원계(朴元桂)가 참패하자, 출정을 자원하여 홍산(鴻山) 싸움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육도 도통사(六道都統使)․삼사 좌사(三司左使)가 되어 서강(西江)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1378년 다시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 풍덕)에 쳐들어오자 이성계 등과 출정하여 이를 섬멸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1380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해도 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철원(鐵原)에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이를 철회시켰으며, 이듬해 수시중(守侍中)을 거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내고, 1384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퇴하다가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여 북변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에 취임,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이성계(李成桂)등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함으로써 요동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를 맞아 싸우다 패전, 체포되어 고봉(高峰 : 고양)에 유배되고 합포(合浦)에 옮겨졌다가 공료죄(攻遼罪)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고려 구파세력의 마지막 보루로서 신진세력 이성계의 군벌(軍閥)과 대결하여 고려를 지키려 한 강용(剛勇)․청렴(淸廉)한 장군이었으나 그의 죽음과 함께 구파세력이 몰락하여 고려왕조의 종막을 초래했다.

최민적(崔閔頔) 시호(諡號)는 문순(文順).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문과 (文科)에 급제하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내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최민사(崔閔思) 고려(高麗)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찬성사 (贊成事)를 지냈다.

최민변(崔閔忭) 시호(諡號)는 문도(文度).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최맹손(崔孟孫) 고려(高麗)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에 오르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진현관 태학사(進賢冠太學士)․밀직제학(密直提學)등을 역임하였으며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다.

최을제(崔乙齋) 고려(高麗)때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역임하였다.

최담(崔 潭) 호(號)는 수숙헌(首宿軒), 영(塋)의 아들. 공민왕 때 조열대부(朝列大夫)로 순천 부사(順天府使)․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언(崔 彦) 호(號)는 징재(徵齋). 고려말에 성천 부사(成川府使)를 지내고 조열대부(朝列大夫)에 이르렀으며 고려가 망한 후 벽동(碧潼)에 은거하였다.

최식(崔 湜) 조선(朝鮮)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최도(崔 渡) 담(潭)의 아들. 조선(朝鮮)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최익(崔 翊) 담(潭)의 증손. 조선(朝鮮)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최충헌(崔忠獻) 조선(朝鮮)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3등공신이 되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선천도호부사(宣川都護府使)․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충국(崔忠國) 조선(朝鮮)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공이 있어,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최낭진(崔良珍) 충국(忠國)의 아들.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공이 있어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최망룡(崔望龍)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최건(崔 建) 자(字)는 사강(士剛). 1593년(선조 26)에 태어나 일찍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안주(安州)의 정방산성에서 적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최간(崔 侃) 건(建)의 동생. 무과에 급제한 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적군의 사정을 정탐하다 붙들려 죽음을 당했다.

최성미(崔聲美) 조선(朝鮮)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최동필(崔東畢) 조선(朝鮮) 효종조(孝宗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追贈)되었다.

최익하(崔翊夏)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최두혁(崔斗赫) 조선(朝鮮)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참판(工曹參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최문형(崔文炯)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최상환(崔尙桓) 조선(朝鮮)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최정섭(崔廷燮) 조선말(朝鮮末)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칙임찬의(勅任贊議)를 역임하였다.

최헌규(崔獻圭) 조선말(朝鮮末)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시종원 부어승(侍從院副御陞)을 역임하였다.

최남선(崔南善) 1890(고종 27)~1957 아명은 창흥(昌興), 교명은 베드루, 자(字)는 공륙(公六), 호(號)는 육당(六堂), 헌규(獻圭)의 아들. 자습으로 국문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황성신문(皇城新聞)」에 글을 투고(投稿), 이듬해 경성학당 (京城學堂)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익혔다.

1904년 황실유학생(皇室留學生)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일(渡日), 도오꾜오 부립중학교(府立中學校)에 입학했으나 3개월만에 귀국했다가 1906년 다시 도일, 아세다 대학 고사부 지리역사과(高師部地理歷史科)에 입학하여 유학생 회보인「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고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模擬國會)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自宅)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출판과 인쇄를 했으며, 이듬해잡지「소년」을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적인소설을 실어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문헌 보전(古文獻保存)을 위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913년 다시「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청춘(靑春)」을 창간했다. 3․1운동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起草)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가출옥(假出獄)되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하여 주간지「동명(東明)」을 방행하는 한편 국사연구(國史硏究)에 전심했다.

1924년「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경영권문제로 보천교(普天敎)와 대립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客員)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논문「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하는 한편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위원회(朝鮮史編修委員會)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강사를 지냈다. 1938년만주 신경(新京)에 가서「만몽일보(滿夢日報)」고문으로 있다가 이듬해에 재만 일본 관동군(在滿日本關東軍)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에서 교편을 잡았고, 귀국 후 1943년 재일(在日) 조선 유학생의 학병(學兵) 지원 권고 강연차 이광수․김연수(金秊洙)․이성근(李聖根)등과 도오꾜오(東京)에 건너갔다.

해방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歷史論文) 집필에 전심하다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기소,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사변 때 해군전사 편찬위원회(海軍戰士編纂委員會) 촉탁을 지낸 후 서울시사 편찬위원회(市史編纂委員會)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 관계의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죽었다.

박람강기(博覽强記)했고, 신문화 수입기에 있어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며, 이원(利原)의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다.

최두선(崔斗善) 1894~1974 호(號)는 각천(覺泉), 육당 최남선의 동생. 서울 출신. 1917년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19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1932년 보성전문학교 상무를 거쳐 8․15해방 후 경성방직 사장, 1947년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1960년 유엔 총회 한국대표, 대한 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으며,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을 개최하고 1963년 국무총리, 1965년 대통령 특사로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청조소성훈장(靑條素星勳章)과 국민훈장무궁화장, 독일연방공화국의 공로훈장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