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홍천피씨시조(洪川皮氏),피위종(皮謂宗),홍천피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9 15:05 수정일 : 2019-02-14 11:5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홍천피씨(洪川皮氏)의 시조(始祖)는 원(元)나라에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낸 피위종(皮謂宗)으로 전(傳)한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동국안렴사(東國安廉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풍물(風物)에 정(情)이 들어 귀화(歸化)하게 되었는데, 충렬왕(忠烈王)이 크게 기뻐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제수(除授)하였고, 뒤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인선(寅善)이 정당문학(政堂文學)․좌복야(左僕射) 등을 지낸 후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홍천(洪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홍천(洪川)은 강원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인데, 신라 때는 녹효(綠驍)로 고쳐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홍천이라 개칭하고 삭주에 그대로 예속시켰으며, 1143년(인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 (태종 13)에 홍천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춘천부(春川府) 홍천군이 되었으며, 1896년 13도제(道制) 실시로 홍천군이 되었다.

1917년 금물산면(今物山面)을 남면, 군내면(郡內面)을 홍천면, 영귀미면(永歸美面)을 동면, 감물악면(甘勿岳面)을 서면으로 고치고, 1935년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분지리(分地里)를 서면 굴원리(屈原里)에 편입시켰다. 8․15해방 후 국토가 양단되면서 38선 이남에 해당되는 인제군 기린면(麒麟面)의 진동리(鎭東里)와 북리(北里)의 각 일부 및 인제면의 원대리(院垈里)와 남면의 어론(於論)․부평(富坪) 등 7개 리(里)를 편입하여 신남면(新南面)을 만들고,인제군 내면(內面)도 편입시켰다. 1954년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직법 시행에 따라 기린면과 남면 등은 인제군에 환원시켰고 1963년 홍천면은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인선(寅善)의 아들 맹문(孟文)이 승지(承旨)를 지냈고, 손자(孫子) 원휴(元休)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고려 말(高麗末)에 순창 현령(淳昌縣令)으로 나간 원량(元亮)은 재임 기간 동안 왜구(倭寇) 방비에 힘썼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천피씨는 전국에 8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홍천피씨조상인물

피인선(皮寅善) 고려조에 좌복야(左僕射)을 역임하였다.

피인고(皮寅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피맹문(皮孟文) 고려에서 승지(承旨)를 지냈다.

피맹인(皮孟仁) 고려 때 직학사(直學士)를 지냈다.

피원휴(皮元休) 고려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피자휴(皮子休) 고려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피원량(皮元亮) 고려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피재구(皮栽九) 조선조에 참의(參議)를 지냈다.

피영기(皮永基) 조선 때 사성(司成)을 지냈다.

피연길(皮然吉)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피세숙(皮世塾) 조선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피병추(皮秉樞) 조선조(朝鮮朝)에 덕망 높은 학자(學者)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