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진양하씨(晉陽河氏),진양하씨시조,하공진,진양하씨유래,진양하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29 16:59 수정일 : 2019-12-03 15:03

진양하씨시조 및 진양하씨유래(본관)

진양은 경상남도 남서쪽 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인데 신라 문무왕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 하였고 757년 강주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로 개칭하였다 고려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에 진주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뒤 조선조 초에 와서는 진양 대 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후 여러 번 변천을 했다.

진양하씨는 삼한시대 부터 알려져 있는 저성이나 고정할 문헌이 없다. 고려시대 부터 진주의 토성으로서 영남에 정착한 하씨는 진주을 비롯하여 여러 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세거지명에 불가하며 그 중에서도 시조가 분명한 것은 진양 (晋陽) 안음(安陰) 강화 (江華) 삼본이다.

그러나 모든 하씨는 진양에서 분파된 것이 확실하므로 오늘날에는 진양하씨는 단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양하씨는 씨족통보. 전고대방 .민족보전 만성통보 등 문헌에 의하면 진양하씨 시조는 고려 현종 2(1010)에 좌사랑중으로 거란에 항거 하다가 살신 구국한 증 문하시랑평장사 충절신 하공진(河拱辰) 공이시다. 연원을 알지 못하는 3계통으로 갈라져 세계를 잇고 있는데 증 문하시랑평장사 하공진(河拱辰) 공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와 또 일파에 고려 때 사직을 지낸 하진(河珍) 사직공파와 또 일파에 도관찰사를 지낸 하충국(河忠國) 공과 일파에 주부를 역임한 하성(河成) 단계공파로 분파 되어있다.

진양하씨는 본관을 진양으로 한 것은 시조 하공진(河拱辰)공이 진주시 남선동 진주성 공원 내 경절사 터에서 탄생하였고 조선 초에 진주 목에서 진양 대 도호부로 승격하고 지명을 진양으로 하였기 때문에 본관을 진양으로하였으며 바로 이곳이 진양하씨의 발상지다.

진양하씨는 시랑공이 이땅에 뿌리를 내린 이래 1천 여년 동안 전국에 분포되어 살아가고 있다.


시조 하공진공의 사적

고려문신 하공진공은 진주시 남성동 진주 성지 내에서 태어나 고려 초기 994(성종13) 압강도 구당사를 역임하고 1009(목종12) 중랑장으로 궁걸을 지키며 목종을 호위하였다. 얼마 후 상서공부 좌사랑중이 되었다.

1010(현종1)에 동서 양계를 지킬 때 동여진 촌락에 진군하였다가 패한 일로 유배당하였다가 그해 거란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고려를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난 하공진은 호부원외랑 고영기와 함께 군사 20여명을 거느리고 남으로 피란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하여 맨몸으로 적진에 들어가 현종의 친조와 자신의 불모를 조건으로 거란군의 성종을 만나 교섭하여 40만 거란군을 철수 시켰다.

하공진은 거란에 볼모로 잡혀가 겉으로는 충근하게 보임으로서 거란군의 신임을 받게 되자 탈출의 목적으로 점검사로서 고려 길에 오르려 했으나 실패하여 연경으로 옮겨가 안주하기를 희망하면서 탈출을 방해받았다

이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아가면서 준마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두고 귀국을 꾀하다가 거란왕의 국문을 받게 되었다 거란왕은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는 고려인이라고 되 뇌일 뿐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거란왕을 크게 격분시킴으로서 처형되고 말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상서공부 시랑에 추증 하였고 이후 문종6(1052)에 하공진의 최후는 살신구국의 표상이 된다하여 문하시랑평장사에 추증 하고 공신각상에 공의 영정을 모시도록 하였다.


진양하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하칙충(河則忠) 고려 문종 6년 (1052) 상서공부 시랑

하정재(河挺材) 고려 의종 2년(1151) 국자감시 십운시에 장원 문과 급제 한림원 학사

하남수(河南秀) 문과에 급제 통의대부 검교 군기감

하소(河 邵) 문과 급제 통의대부 군기 소윤

하식(河 湜) 선관서승 순충보조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사평부사 진강군

하시원(河恃源) 시호(諡號) 문정 (文貞) 식목록사 순충적덕 병의 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판 병조사 진강 부원군

하거원(河巨源) 순충익조 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중정대부 전객영 지미사 배향

하윤린(河允潾) 순흥부사 봉익대부 예의판서 역임 충근익대 보조수의 협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진양 부원군

하윤구(河允丘) 문과 급제 통정대부 부윤

하을지(河乙沚) 1344년에 문과 장원 1366년 전공정랑으로서 홍건적을 개경에서 격퇴하고수복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록 되었다 1375년 전라도 도원수 겸 도안무사가 되었고 청천군에 책록 되었다

하을숙(河乙淑) 한림원 학사 정용량장 비순위 지미사 배향

하을부(河乙桴) 참판 군기감

하을순(河乙洵) 문하시중을 지내다.


조선시대 인물

하륜(河 崙) 자(字) 대림(大臨) 호(號) 호정(浩亭) 시호(諡號) 문충(文忠)  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 文科에 급제했다. 1367년 춘추관 검열등을 거쳐 1371년 고공좌랑 에 승진되었으며 지평 보문각 직제학 대사승을 지냈 다 1383년에 우부대언 밀직제학을 역인하고 1398년 제일차 왕자란 을 평정하게 하였고 정종이 즉위한 후 정사공신 1등으로 책록 되었다

이성계가 천도를 계롱산으로 옮기려 하자 그 뜻을 적극 반대하여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게 하였고 의정부의 6조를 만들어 행정 체제를 병화 시켰으며 태종 원년에 문하시랑 찬성사로서 관계개편을 주도하고 판의 흥삼군부사 우의정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으로 책록 되었고 이어 영삼사사로서 지공거가 되고 관세를 개혁했으며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로서 저화를 유통시켜 지폐 제도를 처음 실시하였으며 고려사 창간을 주도하였고 태종 2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영락제의 등극을 축화 하는 등극사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을 받아 왔다 태종14년 (1414)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태종 16년에 치사 한후 진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사후에 태종 묘정에 배향 되었다.

하유(河 游) 文科 及第 가선대부 검교 한성판윤

하승해(河承海) 병조판서

하지돈(河之沌) 진사 중직대부 연산부사

하지명(河之溟) 진사 급제 초계 군수

하비(河 備) 선락 부사직 호군 단종 손위로 기관

하경복(河敬復) 자() 군팔(君八) 시호(諡號) 양정(襄靖) 140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년 동안(1415-1430 ) 변방에서 국방과 영토 확장에 힘썼다 1422년 함길도 절제사 되었고 1433년 판 중추원사의 직위에 올라 진서를 편찬 할때 총재로 참여하였는데 이것이 계축 진설이다 진도를 함께 주인하여 군사 교육 재료를 삼았다. 1435년 숭정대부 좌찬성에 승진하여 판중추원사 되고 경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하경리 호(號) 참의(參議) 통영대부 병조 판서를 지내고 김해부사 평안도 부사 성주목사를 역임했다

하한(河 漢) 시호(諡號) 강장(剛莊) 1427년 호군 시종관 상호군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454년 경상우도 도절제사, 1456년 판 중추부사 원종공신 3등으로 록훈, 경상좌도처치사 1460년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하숙부(河叔溥) 시호(諡號) 경절(敬節) 1452년 무과 초시에 합격하고 휸령원록사 1460년 길주판관 1466년 통영대부 강계부사 이주 절제사 3등 공신 록훈, 1471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477년 병조참판 1494년 호조참판 명나라 성절단사 1498년 동지중추부사겸부총관 1501년 지중추부사 자헌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하백(河 伯) 충무위 부사직 어모장군

하우치(河禹治) 자(字) 평지(平之) 1514년 무과에 급제 통휸대부 사천현감 여산군수 안주목사를 역임했다.

하활(河 活) 자(字) 사원(士源) 호(號) 양암(陽菴) 승문원 판교 역임. 공조찬의

하윤(河 潤) 자(字) 쉬부(晬夫). 호(號) 운수당(雲水堂)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83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보직되었다. 1487년에 예조좌랑과 호조좌랑을 지내고 이후 형조 좌랑직에 있으면서 강직한 지조로 연산군의 혼정을 좌시 못하고 낙향 하였다가 다시 지평으로 재직 중 1498년 폐비 윤씨의 입조 추숭의 그릇 됨을 극간 하였고 평안도 순천 군수를 지냈으며 정강서원에 배향 되었다.

하면(河 沔) 호조정랑

하위보(河魏寶) 자() 미재(美哉)  생원 순충보조 공신 자헌대부 역임 이조판서 겸 지의검부사 진평군에 책봉

하진보 (河晉寶) 자(字) 덕재(德哉) 호(號) 영모정(永慕亭)  1555년 병과 급제 서장관 정언 헌납 지평 장영 좌사관을 역임하고, 김해 밀양부사 안주 성주 목사 사도어사를 지냈다.

하중보(河仲寶) 자(字) 시재(時哉) 호(號) 죽제(竹齊) 가선대부 공조 참판

하락(河 洛) 자(字) 도원(道源) 호 (號). 환성재(喚醒齋)  선조 무진년에 생원 진사 양시에 장원 급제하고 王子師傅를 지냈다. 1584년 대신소를 올려 율곡 이이의 죄 없음을 주장하였고 상주로 낙향 하였을 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상주성을 침범하여 함락될 위기에 이르자 성을 지키기 위해 아들 경휘와 같이 왜적에 항거 하다가 부자가 같이 순절하였다.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고 도동서원에 배향 되었다.

하수일(河受一) 자(字) 태양(太陽) 호(號.) 송정(松亭)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 신묘(1591) 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산현감 이조정랑 경남도사를 역임하고 대각서원에 배향 되었다.

하성(河 惺) 자() 자경(子敬) 호(號)竹軒 생원 직장 주부 역임하고 장수 현감을 지냈다.

근 대 인 물

하겸진(河謙鎭) 자(字) 숙정(叔亭) 호(號) 회봉(晦峯)  언제나 경학을 근본 삼아 운도학(雲陶學)을 스승 삼아 복응 하였다. 주어절요(朱語節要) 10권을 편찬하였고 다시 어유 판각을 영조 하여 그 재판을 성취하였으며, 도문작해(陶文酌海) 6권을 꾀하고 이 양서를 좌우에 비치하여 진리 심구 하였다.

명사강목(明史綱目) 18권을 저작하여 세상에 폈으며, 만년에는 동시화를 엮어 동방시화의 대종을 이룩하였다. 동방 유현의 학문과 연원을 체계 있게 정리한 동유학안(東儒學案) 30권을 완성하였으며 해동명장(海東名將) 열전을 저술하여 민족 정신 계발에 주력하였다.

하만복(河萬福) 자(字) 원보(元普) 호(號) 목산(牧山) 대한민국 초대 입법위원 국회 2대 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