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상주황씨시조(尙州黃氏),황석주(黃石柱),상주황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6-03 14:42 수정일 : 2019-12-04 11:34

황씨의 득성연원

황씨(黃氏)의 득성 연원(得姓 淵源)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서 확실(確實)하게 고증(考證)이 된것은 없고 황씨(黃氏)의 발생지(發生地)인 중국(中國)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삼황(三皇), 오제(五帝)중 의 한사람인 황제 헌원씨(皇帝 軒轅氏)의 후예(後裔)라고 하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물론 일설(一說)에는 헌원씨(軒轅氏)는 이름이고 성(姓)은 공손씨(公孫氏)라는 말도 있고 또 타설(他說)에는 동 황제(皇帝)의 성(姓)이 모두가 14성(姓)인데 그 중에 황씨 성(黃氏姓)도 포함되어 있다고도 한다.

세계(世界)의 삼대 문명의 발상지(發祥地)의 하나라고 하는 중국의 황하유역(黃河流域)을 중심으로 아득한 옛날에 원시씨족(부족)사회(原始氏族(部族)社會)를 국가(國家)로 통합(統合)하여 통치(統治)하여온 셋 황제인 삼황(三皇)(太昊伏義氏. 女媧氏. 炎帝神農氏 또는 天皇. 地皇. 人皇)과 다섯 제왕(帝王)인 오제(五帝)(皇帝軒轅氏. 顓頊(전욱)高楊氏. 帝嚳(곡)高辛氏. 帝堯陶唐氏. 帝舜有虞氏.)는 모두 성군(聖君)으로 전하여 지고 있으며 특히 황씨(黃氏)의 원시조(元始祖)라고 알려진 헌원씨(軒轅氏)는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인데 소전(少典)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으로 창(槍)과 방패(防牌)를 만들어 신농씨(神農氏)를 패(敗)하고 중원(中原)의 여러 제후(諸侯)와 씨 부족국가(氏 部族國家)를 정벌(征伐)하여 거대(巨大)한 국가를 형성하여 재위(在位)110년에 이르렀다고 하며 재위기간 중 많은 문물(文物)을 일으켜 백성(百姓)을 잘 다스렸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황제의 능(陵)은 합서성 황능현 교산(陜西省 皇陵縣 橋山)에 있고 사당(祠堂)인 헌원묘(軒轅廟)는 하남성 신정시 신점진(河南省 新鄭市 辛店鎭) 근처 구자산 산정(具茨山 山頂)에 있으며 문명(文明)의 개조(開祖)로 추앙(推仰)되고 있다.

여하튼 황제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려 오고 있었으며, 그 후손 백익(伯益. 一說 黃氏의 元祖)의 증손자(曾孫子)인 육종씨(陸終氏)가 상조 말기(商朝 末期) 또는 주조 초기(周朝 初期)에 황국(黃國. 黃子國)(현 中國 河南省 潢川縣)땅에 왕후(王侯)로 봉작(封爵)이 되어 비로소 그 지명(地名)에 따라 후손들이 황씨(黃氏)라는 성(姓)을 사용하게 되었다고도 전하여 지고 있다.

황국(黃國)은 그 후 초(楚)에 의하여 멸망(滅亡)되었는데, 그 유적(遺跡)으로 중국 하남성 황천현에서 서쪽으로 6Km 떨어진 회하(淮河)의 남쪽 강변과 소황하(小黃河)의 서쪽 강변에 위치한 황국 고성(黃國 古城)이 아직도 남아 있다.

황국(黃國)이 멸망(滅亡)한 후 유민(遺民)들은 남북(南北)으로 흩어저 호북(湖北) 강서(江西) 사천지방(泗川地方)으로 도망을 가서 살았고 또 현재의 호남성지역(湖南省地域)으로 강제이주(强制移住)하여 살았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부터 강하현(江夏縣. 현 湖南省 武昌縣. 漢曰 汝南) 일대(一帶)에서 황씨(黃氏)가 발전(發展)하고 번성(繁盛)하였다고 하며 현재 매년(每年) 각국(各國)을 순회(巡廻)하면서 개최(開催)되고 있는 세계황씨종친회(世界黃氏宗親會)에 참여(參與)하고 있는 세계각국(世界各國)의 모든 중국계황씨(中國系黃氏)는 강하황씨(江夏黃氏)로 본관(本貫)이 통일(統一)되어 있다.

우리나라 황씨의 도시조(都始祖)이신 휘 락(諱 洛. 兄弟로 諱 海. 諱 湖가 있었다고 함)조(祖)도 그 후손(後孫)임이 틀림이 없음으로 엄격(嚴格)히 그 부계혈통(父系血統)을 따진다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황씨(黃氏)도 모두가 중국의 강하황씨(江夏黃氏)의 후예(後裔)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황씨연원(黃氏淵源)

우리나라(大韓民國)에 현존(現存)하는 황씨성(黃氏姓)을 가진 사람은 약 70만명이 된다고 하며, 다수설(多數說)에 의하면 후한 광무제건무(後漢 光武帝建武)4년 서기28년 신라 유리왕(儒理王)8년(戊子年)에 한(漢)나라 유신(儒臣)(一說 學士) 휘 락(諱 洛)공은 중국 보송(補松)이라는곳에서 무관(武官)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 구대림(丘大林)등과 벌주(筏舟. 뗏목)을 타고 교지국(交趾國. 현 월남)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 풍랑(風浪)을 만나 표류(漂流)하다가 예국(濊國) 기성(箕城. 新羅 安北府 安戒律. 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월송포 월송봉(月松浦 月松峰) 남쪽 기슭에 있는 굴산북원(掘山北原) 동변 사안(沙岸)에 상육하여 그 후손(後孫)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각처에 세거(世居)하였으니, 휘 락(諱 洛)공이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원조(元祖) 할아버지인 도시조(都始祖)이시다.

도시조(都始祖)의 휘자(諱字)가 락(洛)자(字)인 점(点)에 대하여는 각 파벌(派閥)간에 다툼이 없으나, 그 관작(官爵)과 우리나라에 도래(到來)한 이유(理由)및 시기(時期)등에 대하여는 소수이설(少數異說)도 있으며, 그 중 우리 상주황씨(尙州黃氏) 초간족보(初刊族譜)에는, 휘 락(諱 洛)공은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천보년간(天寶年間)(서기742 - 755. 신라 景德王 1-14年사이)에 승상(丞相)직으로 있다가 중국 절강지방(浙江地方)에서 우리나라에 도래(到來)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추측(推測)해 보면 우리나라에 도래한 이유는 당(唐)나라 6세왕(世王)인 현종14년11월에 중신(重臣) 안록산(安祿山)이 반란(叛亂)을 이르켜 현종은 사천(泗川)으로 몽진(蒙塵)을 하였고 왕비(王妃)인 양귀비(楊貴妃)는 주살(誅殺)되었으며 조정(朝廷)은 산재각처(散在各處)가 되어 고관(高官)들은 각지로 피신하였거나 외국(外國)으로 피난을 간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는데, 도시조인 휘 낙(諱 洛)공도 승상(丞相)으로서 반란군을 피하여 신라(新羅)땅으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진주정씨(晋州鄭氏)의 시조공(始祖公)도 이와 같은 경로를 밟아 본방(本邦)에 내도한 기록(記錄)이 있기에, 우리 족보의 내용도 신빙성(信憑性)이 있는 사실(史實)이라 할수 있다고 1991년2월 족보서문(族譜序文)을 쓴 문학, 교육학 박사 한갑수(韓甲洙) 서울대학교 교수가 논술(論述)하고 있다.


상주황씨 득관유래(尙州黃氏 得貫由來)

우리나라에 거주(居住)하는 모든 황씨(黃氏)는 엄격(嚴格)히 그 혈통(血統)을 따진다면 중국(中國) 강하황씨(江夏黃氏)의 후예(後裔)이기 때문에 모두가 강하황씨(江夏黃氏)가 되어야 하는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境遇)라도 우리의 도시조(都始祖)와 그 자손(子孫)들이 평해(平海)에 세거(世居)하였다면 세거지(世居地)인 평해(平海)가 본관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나, 문헌(文獻)에 의하면 도시조의 자손(子孫)이 오랜기간동안 관향(貫鄕)이 없이 대(代)를 이어오다가 고려중엽(高麗中葉)경?에 분파(分派)를 해서 본관(本貫)을 창시(創始)하여 현재에 이른다는 것이므로 우리 일족(一族)도 고려말엽(高麗末葉)경에 세거지(世居地)인 상주(尙州)를 본관(本貫)으로 정(定)하게 된 것이다.

우리 일족(一族)이 본관(本貫)을 상주(尙州)로 득관(得貫)한 유래(由來)에 대하여 알아 보면 초간족보(初刊族譜) 발간(發刊)때 보다 57년이나 앞선 숙종(肅宗)46년(1720년)에 외손(外孫)인 수록대부 해창위 오태주 시 문효공(綏祿大夫 海昌衛 吳泰周 諡 文孝公. 書藝家. 顯宗의 딸 明安公主의 男便)의 유필(遺筆)로 그 아우 금성현령(金城縣令)오진주(吳晉周)공이 세운 휘 우한(諱 佑漢) 대사헌(大司憲)공의 묘표(墓表)에 소윤 증호조참판 을구 시거 상주 수위상주인(少尹 贈戶曹參判 乙具 始居 尙州 遂爲 尙州人)이라고 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요지(要旨)의 글이 초간족보(初刊族譜)에 기록이 된것으로 보아 상주황씨(尙州黃氏) 4세조(世祖)이신 소윤(少尹) 휘 을구(諱 乙具. 族譜상 乙耈)공이 상주(尙州)에 거주(居住)하기 시작(始作)하여 이어 살았기 때문에 그 자손(子孫)들이 관향(貫鄕)을 상주(尙州)라고 정(定)하게 된것이라고 하는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4세조(世祖)이신 소윤(少尹)공이 시관조(始貫祖)이시며 7세조(世祖)이신 휘 효원(諱 孝源) 시 양평(諡 襄平)공에게 세조(世祖)께서 양평공 부조(襄平公 父祖)이상 선조의 세거지(世居地)인 상산(商山. 尙州 舊號)을 따서 상산군(商山君)으로 봉군(封君)을 한 것을 보더라도 우리 일족은 상주(尙州)가 관향(貫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시점(現時點)에서 파악(把握)이 되고 있는 상주황씨종인(尙州黃氏宗人)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단 平海黃氏 一派인 尙州黃氏 除外) 양평공(襄平公)의 직계후손(直系後孫)이며, 현재의 문경군 농암면 궁기리(聞慶郡 籠岩面 宮基里(古毛里)) 일대지역(一帶地域)이 옛날에는 상주속현(尙州屬縣)으로서 관향 발상지역(貫鄕 發祥地域)으로 확실시(確實視)되므로 그 지역(地域)의 무주고분(無主古墳)을 답사(踏査)한후 상주황씨 관향발상지(貫鄕發祥地)로 지정(指定)을 하여 설단(設壇)을 하는등 성역화사업(聖域化事業)진행을 위하여 매년 그곳 고분을 둘러보고 모색(摸索)을 하고 있는 중이다.

참고: 평해황씨(平海黃氏) 일파(一派)인 상주황씨(尙州黃氏)의 내력(來歷)

평해황씨 시조(始祖)이신 휘 온인(諱 溫仁) 금오장군(金吾將軍)의 후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휘 세명(諱 世明)공께서 상주(尙州)에 거주하다가 제주도(濟州道)에 들어온 것을 길이 기억하고자 그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상주(尙州)로 정하였다고 하며 수백명에 불과 하다고 하지마는 우리 일족(一族)과 엄연히 구별(區別)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시조(始祖)의 사적(事蹟)

엄격(嚴格)히 말해서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시조(始祖)는 도시조(都始祖)이신 휘 락(諱 洛) 승상공(丞相公)이지마는 도시조(都始祖)께서 평해(平海)에 오신 신라조(新羅朝)때부터 고려조 중엽(高麗朝 中葉)까지의 천기백년간(千幾百年間)에 그 자손(子孫)들의 계대(繼代)나 행적(行蹟)이 문헌(文獻)에 뚜렷이 남아 있지 않고 있어 지금(只今)으로서는 그 공백 기간(空白 期間)에 우리 황씨가문(黃氏家門)의 내막(內幕)을 고증(考證)할 길이 없으나, 고려조(高麗朝)에서 황주량(黃周亮)공과 같은 명재상(名宰相)외에 역사(歷史)에 기록이 되어 있는 학자(學者)분등 몇 분이 계시는데, 모두가 관향(貫鄕)이 없는 황씨이기 때문에 어느 관향에 속하는 선조(先祖)인지 알 수가 없고 보면, 혹시(或是) 그 할아버지들께서 우리 상주황씨가문(尙州黃氏家門)의 상계조(上系祖)일수도 있다는 것 이고, 그 개연성(蓋然性)을 뒷 바침 하는 것으로는 우리 상주황씨 초간족보(尙州黃氏初刊族譜)에 “우리 선조(先祖)께서 고려조정(高麗朝廷)에서 대대(代代)로 현관 요직(顯官 要職)을 열역(閱歷)하셔서 명망(名望)이 일세(一世)에 자자(藉藉)하였으나 보책(譜冊)과 기록(記錄)이 전하여진 것이 없어서 알길이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상주황씨 초간족보(初刊族譜)에 따르면 일세조(一世祖)이신 “휘 석주(諱 石柱)공은 고려조(高麗朝)에 입사(入仕)하여 시중(侍中)벼슬을 역임(歷任)하시고 직계(職階)가 상주국(上柱國. 正2品)에 이르신 분이기는 하나 그 이상(以上) 세대(世代)의 명휘(名諱)를 알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 종중(宗中)이 상의(相議)한 결정(決定)에 따라 묘표(墓表)에 쓰여저 있는 비문(碑文)을 쫓아 석주(石柱)공을 시조(始祖)로 쓰지 않고 일세(一世)라고 등재(登載)하였는데 이는 신중(愼重)을 기(期)한다는 의미(意味)에서 이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을 뿐이므로 일세조(一世祖)의 구체적(具體的)인 사적(事蹟)에 대하여 현재(現在)로서는 알길이 없다.


중시조의 사적(中始祖의 事蹟)

우리 상주황씨 가문(家門)의 시조(始祖)라고 할수 있는 일세조(一世祖) 휘 석주(諱 石柱) 상주국(上柱國)공에 대한 사적(事蹟)은 관직(官職)만 전하여 질뿐, 그 사적(事蹟)이 기록된것이 없으므로 중시조(中始祖)이신 휘 효원(諱 孝源) 시 양평(諡 襄平)공의 사적(事蹟)을 기술(記述)하기로 한다.

중시조의 최종직함(最終職銜)은 추충좌익공신 순성좌리공싱 청백리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좌빈객 봉조하 상산군 증시 양평(推忠佐翼功臣 純誠佐理功臣 淸白吏 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世子左賓客 奉朝賀 商山君 贈諡 襄平)공이시다.

공(公)께서는 1414년인 태종(太宗)14년(甲午年) 탄생(誕生)하셨으며 자(字)는 사행(士行)이고 호(號)는 소원(少原. 沙原)이며 증순충 적덕보조공신(贈純忠 積德輔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 상평부원군(商平府院君) 휘 사간(諱 士幹)공이 부친(父親)이시고 정경부인(貞敬夫人) 해주오씨(海州吳氏)가 모친(母親)이시며 고려조(高麗朝)에서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내신 휘 하신(諱 河信)공이 조부(祖父)이시다. 공께서 탄생(誕生)하시던 해에 부공(父公)께서는 천인상감지도(天人相感之道)라는 과제(科題)에서 영상(領相)을 지낸 정인지(鄭麟趾)공등과 함께 약관(若冠)19세의 나이로 대과(大科. 文科)에 급제(及第)하신 천재(天才) 이셨다.

공께서는 용모(姿貌)가 단중(端重)하시고 풍의(風儀)가 수랑(秀朗)하시며 처신(處身)과 행사(行事)하심이 범인(凡人)과 크게 다른지라 당시(當時)의 주위사람들이 다같이 경대(敬待)하였다.

3세때 부친(父親)이신 상평부원군(商平府院君)께서 21세의 젊은 나이에 홍문관(弘文館) 정자직(正字職)으로 재임 중에 두환(痘患. 天然痘)로 아깝게 하세(遐世)하시니 공께서는 친상(親喪)을 당하여 시종범절(始終凡節)과 법도(法度)에 맞게 3년상(3年喪)을 치루고 어머님을 섬기시며 화기(和氣)있고 즐거운 빛으로 그 뜻을 받들어 가사범백(家事凡百)에 어머님의 뜻에 순종(順從)하는 한편 학문(學文)을 닦으실때에 한(漢)나라 무제(武帝)때의 대유학자(大儒學者)인 동중서(董仲舒)와 당(唐)중엽의 대문호(大文豪)인 한창여(韓昌黎)등의 업적(業績)과 가르침등을 일심(一心)으로 각고정려(刻苦精勵)하시니 필경은 문장(文章)의 대가(大家)를 이루시고 예림(藝林)에 그 명성을 떨치셨다.

공께서는 이와같이 절차탁마(切磋琢磨)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쌓아 1444년(세종26년 갑자년)에 임인 풍속 형벌 호구 역민(任人 風俗 刑罰 戶口 役民)이라는 과제(科題)에서 대과(大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시어 그 명성(名聲)을 세상(世上)에 널리 알렸는데 그때 춘추(春秋)가 31세이셨으며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은영연(恩榮宴)을 베푸심에 공께서는 문과(文科) 33명 무과(武科)28명의 합격자(合格者)를 대표하여 충성(忠誠)을 맹서(盟誓)하는 명 전문(名 箋文)을 지어 바치셨다.

그리하여 초임(初任)으로 종6품 참상(參上)인 예빈시 주부(禮賓寺 主簿(현재의 儀典官)을 제수(除授)받고 곧 이어 사정기관(司正機關)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좌헌납(左獻納)에 승직이 되었으며 문종(文宗)때에 예조정랑(禮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치면서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이 되셨고 단종(端宗)때에 의정부 검상(議政府 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으로 승직이 되고 단종(端宗)3년에 정3품(正3品)인 사복시윤(司僕寺尹) 겸 보문각 판교(寶文閣 判敎)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자 수충위사동덕(輸忠衛社同德) 좌익3등공신(佐翼3等功臣)의 록훈(錄勳)과 함께 당상관(堂上官)인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겸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고 이듬해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처 세조(世祖)3년에 종2품(從2品)인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승직(陞職)이 되어 그해 8월25일 성절사 및 천추사(聖節使 및 千秋使)로 명(明)나라에 가셨다가 돌아 오셔서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체직(遞職)이 되면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상산군(商山君)으로 봉군(封君)이 되셨다.

공은 세조4년에 한성부윤(漢城府尹)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직을 제수받았으며 곧이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겸 보문관제학(寶文館提學)으로 체직(遞職)이 되고 그후 다시 형조참판(刑曹參判)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 都觀察使)를 거처 예조참판(禮曹參判), 경기도 도관찰사(京畿道 都觀察使), 다시 한성부윤(漢城府尹), 인순부윤(仁順府尹),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 都觀察使)를 지나고 정헌대부(正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직이 되면서 원각사 제조(圓覺寺 提調)직과 겸직으로 보신각 주조제거감(普信閣 鑄造提擧監)을 제수 받았으며 보물2호(寶物2號)인 보신각종(普信閣鐘)에 공의 관직성명(官職姓名)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공은 그후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등을 겸직하셨으며 예종(睿宗)때에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을 제수받았고 성종(成宗)때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의정부우참찬(行議政府右參贊)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봉조하(奉朝賀)로 계실때에 순성명량경제홍화(純誠明亮經濟弘化)좌리공신4등(佐理功臣4等)으로 록훈이 되셨는데 1481년(成宗12년)9월19일 하세(遐世)하시니 춘추(春秋)가 68세이셨고 조정(朝廷)에서는 철조조제(轍朝弔祭)의 예(禮)로서 장사(葬事)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양평(襄平)이라 내리셨다.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서거정(徐巨正)이 왕명(王命)에 따라 인각(麟閣, 忠勳府)에 걸어둘 양평공 화상(襄平公 畵像)의 찬(贊)을 지어 바치었다.

공의 묘소(墓所)는 광교산(光敎山) 남록(南麓)인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984번지 안산고속도로변(安山高速道路邊)에 있으며 불조전(不祧典) 불천위(不遷位)이시니 사당(祠堂)은 양평묘(襄平廟)라,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 매봉재 서남록에 세워저 있었으나 협소(狹小)하고 주위가 소란(騷亂)하여 종의(宗議)에 따라 1999년 경치가 수려(秀麗)한 종산(宗山)자락인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956-3번지 소재 종토(宗土)상으로 이건(移建)하였으며 앞뜰에 재실(齋室)인 상산재각(商山齋閣)도 2001년에 신축(新築)하였고 신도비(神道碑)도 묘소(墓所)에서 그곳으로 이수(移竪)하였다.

襄平公 畵像 贊文

公質端正公性亮直 首登龍榜而名動縉紳 再圖麟閣而功存社稷 年垂七耋白髮爲榮 官躋一品素心彌篤 盖斯文之山斗 益永思者年德

大提學 徐 巨 正 敎撰


상주황씨조상인물

신라시대 인물

황창랑(黃倡郞) 신라(新羅)의 무동(舞童). 무용(舞踊)에 뛰어나 나이 15,6세로 왕에게 백제왕(百濟王)을 죽이겠다고 약속, 백제(百濟)에 들어가 궁중(宮中)에서 검무(劍舞)를 추다가 왕을 죽인후 붙잡혀 죽었다. 이 소식(消息)을 듣고 그의 모친(母親)이 눈이 멀었으나 사람들이 검무를 추면서 창랑(倡郞)이 돌아왔다고 말하여 멀었던 눈을 뜨게 하였다. 이로 부터 황창무(黃倡舞)가 향악(鄕樂)에 실려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인물

우리 황씨는 고려조(高麗朝) 중기(中期)경 이전까지에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지낸 명재상(名宰相)이라 하더라도 관향(貫鄕)없이 그냥 황씨성(黃氏姓)과 휘자(諱字)만이 전하여저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다른 거족(巨族)과는 달리 씨족이 번창(繁昌)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되며, 우리 상주황씨 초간족보(初刊族譜)에도 일세인 휘 석주(諱 石柱)공의 상계조(上系祖)가 고려조에서 역대(歷代)로 고관대작을 열력(閱歷)하였다고 기록(記錄)이 되어 있으나 아쉽게도 그 명휘(名諱)가 전(傳)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안타까운 일이며 역사상(歷史上)에 남을 위대(偉大)하신 선조(先祖)님들을 자기 관향(自己 貫鄕)이 아니라는 이유(理由)만으로 한국씨족총감(韓國氏族總鑑)에서 등재누락(登載漏落)시키는 일은 숭조사상(崇祖思想)에 배치(背馳)될뿐만 아니라 선조(先祖)에 대하여 큰 실례(失禮)가 된다고 사료(思料)되며, 또한 상주황씨(尙州黃氏)의 상계조(上系祖)일 개연성(蓋然性)도 다분(多分)히 있으므로 황씨중앙종친회(黃氏中央宗親會)에서 1973년도에 발간한 황씨명헌록(黃氏名賢錄)에 등재된 관향(貫鄕)이 기재되지 아니하면서 일세(一世) 휘 석주(諱 石柱)공 보다 상계조(上系祖)에 해당(該當)된다고 사료되는 몇분의 할아버지를 여기에 기록하고자 한다.

황주량(黃周亮) (?-1043) 고려 정치가(政治家). 1004년 4월(穆宗7년)의 과거(科擧)에 장원급제(壯元及第). 사관수국사(史館修國史)가 되어 태조(太祖)로 부터 목종(穆宗)에 이르기 까지 7대 왕조(王朝)의 사적(史蹟)36권을 편수(編修)하였으며 예법(禮法)과 국사편찬(國史編纂)에 많은 공을 세운 분으로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으로 녹훈(錄勳)이 되고 호부상서(戶部尙書) 이부상서(吏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正二品)등을 거쳐 1043년에 최고품계(最高品階)인 수태보 겸 문하시중(守太保 兼 門下侍中)(이조때의 영의정 격)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상주국(上柱國)에 올랐고 시호(諡號)는 경문(景文)이며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에 추증(追贈)이 되고 정종(靖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이 되셨다.

황영(黃 塋) 고려 학자(學者). 1095년(玄宗 원년)에 禮部尙書同知樞密院事가 되고 이어 參知政事겸 知貢擧少傅를 거처 1099년에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정이품)에 이르렀다. 사학(私學)을 세워 후진(後進)을 가르쳤으며 이들을 정경공도(貞敬公徒)라 불렀는데 학도(學徒)를 가르치는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였으며 시호(諡號)는 정경(貞敬)이시다.

황유현(黃兪顯) 고려 무신(武臣). 1095년에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고 그 이듬해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으며 1106년에 흥위위상장군(興威衛上將軍)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셨다.

황종각(黃宗慤) (?-1096) 고려 문신(文臣). 1093년에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1095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으며 시호는 개숙(凱肅)이시다.

황석주(黃石柱) 상주황씨 일세(尙州黃氏 一世) 시중 상주국(侍中 上柱國)

황진경(黃進慶) 문하시중(門下侍中)

황자신(黃自新) 삼중대광(三重大匡)

황을구(黃乙耈, 具) 문과급제(文科及第). 소윤(少尹).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제안군(齊安君)공께서 상주(尙州. 현재의 문경군 농암면 궁기리(고모리))에 거주(居住)하기 시작(始作)하였기 때문에 관향(貫鄕)이 상주(尙州)로 되었다고 전하여 짐.

황하신(黃河信) 문과급제(文科及第). 봉선대부(奉善大夫) 종부시정(宗簿寺正).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고 공의 여식(女息)이 이조(李朝)태종17년 명(明)나라 제3대 영락황제(永樂皇帝)의 후궁(後宮)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左議政 韓確의 女동생)와 같이 선발(選拔)되어 명황실(明皇室)에 입궁(入宮)하였음.

조선시대 인물

황사간(黃士幹) (1396-1416) 16세시 소과(小科) 생원시(生員試) 합격(合格). 19세시(1414) 천인상감지도(天人相感之道)라는 과제(科題)에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정인지(鄭麟趾)공과 같이 참방(參榜)하신 천재(天才).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직에 종사(從事)하다가 21세의 약관(若冠)에 두환(痘患)으로 서거함. 증 순충적덕보조공신(贈純忠積德輔祚功臣)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 상평부원군(商平府院君)으로 봉군(封君)이 되었으며 묘소(墓所)는 경기도 광교산 남록의 안산고속도로 변인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984번지에 정경부인(貞敬夫人) 해주오씨(海州吳氏)와 싸분(雙墳). 매년4월5일 묘사(墓祀)를 대종회 주관(主管)으로 봉행(奉行)되고 있다.

황효원(黃孝源) (1414-1481) 자 사행(字 士行) 호 소원(號 少原. 沙原) 文臣. 휘 사간 (諱 士幹)의 아들. 상주황씨 중시조(中始祖). 1444년(세종26년)에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 弟). 세조즉위(世祖卽位)에 공이 있어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으로 녹훈(錄勳),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상산군(商山君)으로 봉군(封君)이 되고 그후 대사헌(大司憲), 한성부윤(漢城府尹), 충청도(忠淸道) 경기도(京畿道)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 형조(刑曹) 예조(禮曹) 호조참판(戶曹參判)등을 거쳐 형조(刑曹) 이조판서(吏曹判書).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거쳤으며 성종(成宗)대에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으며 세종(世宗)때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이되고 봉조하(奉朝賀)이시며 시호(諡號)는 양평(襄平)이시다. 묘소는 양친(兩親)의 묘소 서편(西便)에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쌍분으로 모셔저 있으며 불천위 (不遷位) 사당(祠堂)인 양평묘(襄平廟)와 재실(齋室. 商山齋)은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에 있고 매년 음력 9월18일에 기제(忌祭)를 올리고 있으며 매년 4월5일(식목일)에는 묘제도 올리고 있다.

황석경(黃碩卿) (1429-1490) 자 이대(而大) 어모사정(禦侮司正) 의흥위 대호군(義興衛 大護軍) 증자헌대부(贈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련(吏曹判書 兼 知經筵) 양관제학(兩館提學)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황준경(黃俊卿) 자 이걸(而傑) 통정대부(通政大夫) 선산대도호부사(善山大都護府使) 겸 선산진관 토포사(善山鎭管 討捕使)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양전도회 경차관(量田都會 敬差官)

황윤충(黃允充) 자 이경(而敬) 직산현감(稷山縣監)

황기필(黃耆弼) 자 충로(忠老) 익산군수(益山郡守)

황기찬(黃耆贊) 자 훈옹(勳翁) 경흥부사(慶興府使) 예빈시 첨정(禮賓寺 僉正)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통훈대부(通訓大夫) 행군자감정(行軍資監正)

황세은(黃世慇) 자 성백(誠伯)영흥팡관(永興判官)사복시정(司僕寺正) 호조참판(戶曹參判)

황세근(黃世懃) 자 성중(誠仲) 증가의대부(贈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 (同知義禁府事) 행어모장군 충좌위 부사과(行禦侮將軍 忠佐衛 副司果)

황우상(黃佑商) (1554-1620) 자 여림(汝霖) 호 염헌(廉軒) 효자 독행(孝子 篤行) 덕산현감(德山縣監) 인산수개 도감 감역관(因山修改都監 監役官)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 贊善) 증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 左承旨)

황우한(黃佑漢) (1541- 1606) 자 여충(汝忠) 호 동산(東山) 1574년 문과급제(文科及第) 가의대부(嘉義大夫) 경기도(京畿道)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호조(戶曹)이조(吏曹)병조참판(兵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홍문관부제학(弘文館 副提學) 겸 사옹원 제조(司甕院 提調)를 거처 사헌부 대사헌 (司憲府 大司憲)으로 재직중에 하세(遐世)하셨다. 임란(壬亂) 선무원종1등공신(宣務原從1等功臣)이시다.

황유길(黃惟吉) 자 선응(善應) 비인현감(庇仁縣監) 증승정원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

황이창(黃以昌) 자 원수(元叟) 1613년 사마시 생원(司馬試 生員) 선공감 감역관(繕工監 監役官) 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철원(鐵原) 병마암(兵馬岩)전투에서 아우 이영(以榮)과 함께 순절(殉節)하였으며 여식(女息. 婿 淸州人 韓公休)도 함께 순절(殉節). 정려(旌閭)

황이영(黃以榮) 자 기선(基先) 봉전대부(奉正大夫) 종친부 전첨(宗親府 典籤) 백형(伯兄) 이창(以昌)과 함께 순절.

황이익(黃以翼) 자 심일(心一)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 승의부위(承議副衛) 문장(文章)으로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함.

황이환(黃以煥) 자 회수(晦叟) 충의위 부호군(忠義衛 副護軍)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贈嘉善大夫 戶曹參判)

황언장(黃彦長) 무과(武科) 오위장(五衛將)

황정영(黃挺英) 자 수부(秀夫) 선무랑(宣務郞) 증 통정대부좌승지(贈 通政大夫左承旨)병자호란(丙子胡亂)때 동작진(銅雀津)에서 순절.

황정호(黃挺豪) 자 수언(秀彦) 선교랑(宣敎郞) 증 통훈대부사복시정(贈通訓大夫司僕寺正)

황중남(黃重男) 자 명징(明徵)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황의(黃 의) 자 여수(汝秀) 증 호조참판 상원군(贈戶曹參判 商原君)

항기(黃 기) 자 철장(哲嶂) 증 한성부 우윤(贈漢城府 右尹)

황징(黃 徵) (1635-1713) 자 응삼(應三) 호 반계(磻溪) 1662년 사마시 생원(司馬試 生員) 1669년 무과(武科) 해남현감(海南縣監) 풍천부사(豊川府使) 양주목사(楊州牧使) 전라수사 (全羅水使) 승정원 동부승지겸 경연(承政院 同副承旨 겸 經筵)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 兵馬節度使) 금위별장 겸 부총관 겸 포장 겸 훈련도정(禁衛別將 겸 副摠管 겸 捕將 겸 訓練都正) 형조참판(刑曹參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지훈련원사(知訓練院使) 총융사(總戎使) 어영대장 겸 비국당상(御營大將 겸 備局堂上)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歷任)하셨다.

황암(黃 嵒) 어모장군(禦侮將軍)

황연(黃 埏) (1604-1667) 자 중후(仲厚) 1651년 무과(武科) 선전관청 선전관(宣傳官廳 宣傳官) 군기첨정(軍器僉正) 진주영장(晉州營將) 백령첨사(白翎僉使) 명천부사(明川府使) 통정대부(通政大夫)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병조참판(贈 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황전(黃 㙉) 자 극후(克厚) 사마시(司馬試) 군수(郡守)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

황유신(黃維新) 자 선익(善益) 오위 부호군(五衛 副護軍)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황윤제(黃允濟) 자 자극(子克) 증동지중추원사(贈同知中樞院事) 상은군(商恩君)

황태윤(黃泰允) 자 여길(汝吉)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황기민(黃基民) 자 위천(爲天)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황윤섭(黃允燮) 자 집경(執卿) 덕산현감(德山縣監) 선공감 감역관(繕工監 監役官)

황인서(黃寅瑞) 자 백휴(伯休)어모장군(禦侮將軍)충청수군우후(忠淸水軍虞侯) 경력(經歷)

황진서(黃震瑞) 자 휴징(休徵) 1665년 무과(武科) 선전관청 선전관(宣傳官廳 宣傳官)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경상좌도수군 우후(慶尙左道水軍 虞侯) 공양(昆陽), 거창(居昌), 이산군수(理山郡守) 통정대부(通政大夫) 오위장(五衛將)겸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갑산부사(甲山府使)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안주진관병마첨절제사(安州鎭管 兵馬僉節制使)

황종서(黃宗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황유서(黃有瑞) 자 일청(一淸) 1676년 무과(武科) 공조 형조좌랑(工曹 刑曹佐郞) 중직대부구성부사(中直大夫 龜城府使)

황수민(黃壽民) 자 국로(國老) 무과(武科) 오위 부사과(五衛 副司果) 증 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 左承旨)

황부민(黃富民) 자 국보(國輔) 무과. 선전관청 선전관(宣傳官廳 宣傳官)

황수연(黃壽延) 자 국주(國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 한성좌윤(贈漢城左尹)

황재청(黃載淸) 자 성징(聖徵) 문장가(文章家) 양평공 유사 찬(襄平公 遺事 撰)

황익선(黃益璇)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 龍驤衛 副護軍)

황식(黃 軾) 자 자첨(子瞻) 호 아미산인(峨嵋山人) 예빈시 별제(禮賓寺 別提) 증 한성좌윤(贈漢城左尹)

황환(黃 瓛) 자 사규(士圭) 사마시(司馬試) 토운대부 도호부사(通訓大夫 都護府使)

황옥(黃 鈺) 자 여옥(汝玉) 무과(武科) 통훈대부 행 해남현감(通訓大夫 行 海南縣監) 어모장군(禦侮將軍)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 都事)

황재징(黃再澂) 자 징보(澂甫) 1704년 무과(武科). 칠곡(漆谷) 부령(富寧) 명천(明川) 철원부사(鐵原府使)

황두기(黃斗基) 자 천운(天雲) 무과. 증 호조참판(贈戶曹參判)

황사일(黃思逸) 자 치경(致敬)통덕랑(通德郞) 1777년 초간족보 발간(初刊族譜 發刊)

황사재(黃思載) 자 재영(載永)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황정호(黃廷豪) 자 여웅(汝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벽동진권관(行碧潼鎭權管)

황사한(黃思漢) 자 성순(聖淳) 호 죽암(竹岩) 이조정랑(吏曹正郞)

황득중(黃得中) 자 성득(聖得) 증 통훈대부 군자감정(贈 通訓大夫 軍資監正)

황주(黃 澍) 자 희보(喜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초간족보 발문(初刊族譜 跋文)

황연(黃 涎) 자 광보(光甫) 증통훈대부 군자감정(贈通訓大夫 軍資監正)

황종(黃 淙) 자 원보(源甫) 증통훈대부 사복시정(贈通訓大夫 司僕寺正)

황택(黃 澤) 자 숙함(叔涵) 1713년 무과(武科) 곽산(郭山) 락안(樂安) 박천(博川) 흥해군수(興海郡守)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황응규(黃應奎) 자 성오(星五) 1807년 사마시(司馬試)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

황봉규(黃鳳奎) 자 경숙(敬淑) 호 운암(雲菴) 호조정랑(戶曹正郞)

황성규(黃星奎) 괴산군수(槐山郡守)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 副護軍)

황하명(黃河明) 자 사원(士源)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贈 通政大夫 刑曹參議)

황하룡(黃河龍) 자 군대(君大)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贈 通政大夫 工曹參議)

황로(黃 櫓)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贈 通政大夫 工曹參議)

황남(黃 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황처겸(黃處謙)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봉석(黃鳳錫) 자 붕지(朋之) 무과 선전청 선전관(宣傳廳 宣傳官)

황만종(黃萬鍾) 자 락숙(洛叔)1843년 사마시(司馬試)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

황중석(黃重錫) 초명 중하(重河) 자 사청(士淸) 수군첨절도사(水軍僉節度使)

황백석(黃伯錫) 초휘 백룡(初諱 伯龍) 자 백문(伯文) 호 경암(擎庵) 호조좌랑(戶曹佐郞)

황석대(黃錫大) 자 학대(鶴大) 통정대부 행창원군수(通政大夫 行昌原郡守)

황석복(黃錫福) 초휘 응복(初諱 應福) 자 치경(致敬) 한성좌윤(漢城左尹)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

황석홍(黃錫弘) 자 대여(大汝)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겸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 摠管)

황진규(黃鎭奎) 울진현감(蔚珍縣監)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황인호(黃仁浩) 초휘 처인(處仁) 자 백인(伯仁)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좌위 부사과(行 忠佐衛 副司果)

황묵호(黃黙浩) 초휘 처묵(處黙) 자 군첨(君膽)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황성호(黃聖浩) 1830년 경인정려지전(庚寅旌閭之典) 증 병조참판(贈 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황규하(黃奎河) 자 성숙(星淑)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

황도하(黃圖河) 자 구서(龜瑞)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황운하(黃運河) 자 천일(千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 副護軍)

황명호(黃命浩) 자 천여(千餘)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 副護軍)

황종악(黃宗岳) 자 맹륜(孟崙) 호 송천(松泉) 1849년 사마시(司馬試)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황종대(黃宗垈) 자 맹표(孟表) 호 운초(雲樵) 1867년 사마시(司馬試)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갔을 때 청나라 학부상서(學部尙書) 황상운(黃翔雲)등 많은 문인(文人) 달사(達士)와 더불어 학문(學問)을 수창(酬唱)하여 문장(文章)이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귀국하여 북원일기(北轅日記)라는 두권의 책(冊)을 저작(著作)하였으나 발간(發刊)치 못하였음은 후학(後學)을 위하여 애석(哀惜)한 일이다.

황세호(黃世浩)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사맹(行龍驤衛 副司猛) 학관(學官)

황준동(黃浚東) 자 윤여(潤汝) 통정대부(通政大夫)행통예원사향인의(行通禮院司香引義)

황도동(黃道東)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行 忠武衛 副司勇) 충훈부 장사랑 도사(忠勳府 將仕郞 都事)

황여동(黃呂東) 초휘 종려(鍾呂) 자 문재(文在) 선략장군(宣略將軍) 사량만호(蛇梁萬戶)

황신동(黃信東) 자 종신(鍾信) 절충장군(折衝將軍)행 용양위 부사과(行 龍驤衛 副司果)

황혁동(黃赫東) 초휘 종혁(鍾赫) 자 문종(文鍾)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사과(行龍驤衛 副司果)

황학동(黃鶴東)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황춘동(黃春東) 자 경치(景致) 통훈대부(通訓大夫)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황봉동(黃鳳東) 초휘 재봉(在鳳) 자 정심(正心) 1830년(특몽 정려지전)特蒙 旌閭之典

황윤동(黃潤東) 자 덕신(德身) 호 석천(石泉) 장서(長瑞) 고성(固城) 합천(陜川) 거창군수(居昌郡守) 6.25 사변 시 피납(被拉). 합천읍 함벽루(陜川邑 涵碧樓)에 선정비(善政碑)

황희철(黃羲哲) 자 응명(應明) 호 춘포(春圃) 선전청 선전관(宣傳廳 宣傳官)

황희룡(黃羲龍) 무과.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용양위 부사과(行 龍驤衛 副司果)

황희현(黃羲賢) 충훈부 도사(忠勳府 都事)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충무위 부사용(行 忠武衛 副司勇)

황희모(黃羲模) 초휘 용연(龍淵) 자 성모(性摸) 충무위 부사과(忠武衛 副司果)

황희민(黃羲民) 자 순가(舜歌) 호 해촌(海村) 평창(平昌)금화(金化)양양군수(襄陽郡守)

황로직(黃魯直) 초휘 정구(廷耈) 자 숙경(淑敬) 무과.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 첨정(僉正)선전청 선전관(宣傳廳 宣傳官) 어영청 파총(御營廳 把摠)

황학재(黃學在) 선략장군(宣略將軍) 행충무위 부사용(行忠武衛 副司勇) 충훈부 도사

황봉재(黃鳳在)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 副護軍)

황기주(黃基宙) 자 성청(聖淸) 호 죽보(竹甫)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

근대 인물

황로관(黃魯寬) 자 치교(致敎) 호 송포(松圃) 송적비 송정종산(頌績碑 松亭宗山) 보은군민대표(報恩郡民代表) 보은향교 전교(報恩鄕校 典敎)

황노식(黃魯軾) 자 흥태(興泰) 호 동범(東凡) 예문가(禮文家) 교육가(敎育家) 신흥학원(新興學院) 설립. 충효돈독(忠孝敦篤)

황재호(黃在虎) (1885-1945)호 석아(石我)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선구자(先驅者) 한일합병반대(韓日合倂反對) 학생사건 주모자(學生事件主謀者)로 투옥(投獄).....(純宗實記) 송립학교 설입(松立學校 設立) 경영중 일제탄압(日帝彈壓)으로 폐교(閉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