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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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12-31 10:47 수정일 : 2018-01-09 11:08

1. 씨족(氏族)의 연원(淵源)

가. 시조와 진한(辰韓) 6촌

경주이씨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삼국유사』에는 기원전 117년에,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4영산(靈山)의 하나인 경주 서북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있다. 신라 6촌(村)은 알천양산촌 (閼川楊山村)․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등인데『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 9년 봄에 6부(部)의 이름을 고쳤는데, 양산부(楊山部)→밑돌부(及梁部)(李氏)/고허부(高墟部)→새돌부(沙梁部)(최씨)/대수부(大樹部)→점돌부(漸梁部)(孫氏)/우진부(于珍部)→본피부(本彼部)(鄭氏)/가리부(加利部)→한기부(漢祇部)(裵氏)/명활부(明活部)→습비부(習比部)(薛氏)로 했다고 있는데,『삼국유사』에는 이와 달리 새돌부(沙梁部)를 정씨(鄭氏)의 본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조의 영지(領地)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은 뒤에 밑돌부(及梁部)가 되는 뿌리의 마을로 6촌의 모체이고 밑돌부의 촌장인 알평(謁平)은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나. 계대(系代)와 분파(分派)

경주이씨의 시조는 알평공(謁平公)이지만 시조에서 신라말의 거명(居明)까지는 계대(系代)가 자세하지 않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때 소판(蘇判)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시조(中始祖) 곧 기세조(起世祖)가 되었다. 경주이씨에서 분적(分籍)한 합천이씨(陜川李氏)의 계보(系譜)에는 알평 이후의 계차(系次)가 명시되어있고 또 경주이씨 문중(門中)의 모인이 수 백년전에 계보를 발견했노라고 제시한 것이 있으나 선대 때부터 대동보(大同譜)의 총편(總編)의 말미에 참고 자료로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제시해 놓았을 뿐 정식 계대로 채택하지는 않고 있다.

경주이씨는 알평의 후손에서 구(球)를 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위(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개(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거명의 6세손인 주좌(周佐)를 시조로 하는 아산이씨(牙山李氏)․그의 아들 우칭(禹偁)을 시조로 하는 재녕이씨(載寧李氏)․거명의 15세손인 편(翩)의 아들 임간(林幹)을 시조로 하는 장수이씨(長水李氏)․거명의 17세손인 수(蓨)의 아들 영재(永梓)와 군제(君梯)를 시조로 하는 진주이씨(晉州李氏)․거명의 19세손 반계(攀桂)를 시조로 하는 원주이씨(原州李氏) 등으로 분적되었다.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 몇본의 이씨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派生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시조(中始祖) 거명(居明)으로부터 분파한 본손(本孫)들은 11개파로 나뉘어 있으나 중앙화수회를 중심으로 일가(一家)로서 부끄럽지 않은 결속력(結束力)을 과시하고 있다.

대체로 거명으로부터 분파를 하기 시작하는데, 16세 인정(仁挺)을 파조(派祖)로 하는 성암공파(誠菴公派)․17세 제현(齊賢)을 파조로 하는 익재공파(益齋公派)․역시 17세 천(蒨)을 파조로 하는 국당공파(菊堂公派)․그 아우 매(邁)를 파조로 하는 부정공파(副正公派)․그 아우 과(薖)를 파조로 하는 상서공파(尙書公派)․그 아우 수(蓨)를 파조로 하는 사인공파(舍人公派)․15세 강(康羽)을 파조로 하는 판사공파(判事公派)․17세 지수(之秀)를 파조로 하는 월성군파(月城君派)․19세 양오(養吾)를 파조로 하는 직장공파(直長公派)․19세 존오(存吾)를 파조로 하는 석탄공파(石灘公派)․19세 존사(存斯)를 파조로 하는 교감공파(校勘公派)등 11개파로 나뉘었다.

대파(大派)의 종회(宗會) 가운데는 가장 현달(顯達)한 가문(家門)부터 별칭이 있는데, 상서 공파의 <오신(五臣)집>이 있고 <오신집>속에 <백사(白沙)집>이 가장 두두러지며 그 다음으로 익재공파의 <팔별(八鼈)집>이 있고 국당공파의 <팔정(八廷)집>이 있으며 우의정(右議政) 완(浣)의 <정익(貞翼)집>과 좌의정 경억(慶億)의 <화곡(華谷)집> 등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다. 족보와 항렬

경주이씨의 세보(世譜)는 숙종 10년(서기 1684년)의 <갑자보(甲子譜)>․영조 24년(서기 1748년)의 <무진보(戊辰譜)>․순조 14년(서기 1814년)의 <갑술보(甲戌譜)> 등 세 대동보(大同譜)를 ≪갑무갑 3대보(甲戊甲 3大譜)≫라고 부르며 그후의 모든 소지(小誌. 족보의 기록)의 연원을 삼고 있다. 최근의 대동보로는 서기 1987년의 <정묘보(丁卯譜)>가 있다.

경주이씨의 항렬(行列)은 35세(世)까지는 <갑자보>에서 정하였고 35~70세까지는 고종 때 의 영의정이었던 귤산공(橘山公) 유원(裕元)이 제정하였다.

 

2. 시조와 그 업적

가. 신라의 건국과 민주주의의 극치인 <화백(和白)>

『삼국유사』에는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기원전 69년) 3월 1일 6촌의 촌장들이 각기 그의 자제(子弟)들을 이끌고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謁平公)이 다스리는 알천(閼川)의 안상(岸上)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고 있다. 이것이 ‘사로국(斯盧國)’으로서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를 세운 신라의 전신이다. 그런데 이 때에 6촌민들이 회의를 하면서 준수해 오던 의론과 결의의 방법 이 바로 ≪화백(和白)≫이라는 것이다.

이 ≪화백≫제도는 신라 후대에 전통화 된 관례인데,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저들의 사서(史書)에도 간략한 기록이 보인다.『수서(隋書)』신라전(新羅傳)에는共有大事 則聚群官 詳議完之 (공공의 큰 일에는 많은 관리들을 모아놓고 자상하게 의논하여 완결짓는다.)고 있고『당서(唐書)』신라전에는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 (일은 반드시 많은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는데 화백(和白) 이라고 부른다. (논의하다가도) 한 사람이 의견을 달리하면 그만둔다.) 고 있다.

이 ≪화백제도(和白制度)≫를 기원전 69년의 알천 안상의 6촌회의에서 유래했는데, 어떤 이는 이 화백제도 를민주주의의 발상(發祥) 이라고 하였으나 민주주의의 발상 이라기 보다는 완성 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철칙(鐵則)이 있다. 그러나 ≪화백≫은 100명이 지지하더라도 1명이 반대하면 그 안건을 아예 폐기해버리는 것이니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들더라도 참석인원 전원의 지지 없이는 가결하지 않는다는 철칙―이것이 ≪화백≫이다. 참석인원 전원의 지지로 결의하였으니 책임도 또한 전원이 질 것 아닌가? 신라가 992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누린 배경에는 이와 같은 ≪화백의 철칙≫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6촌이 단순한 원시부족사회가 아니라 이미민주주의가 완성된 사회 이기 때문에 화백제도와 같은 고도의 도덕사회가 탄생하고 또 준용(遵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으로는 <건국회의>에서도아이들이 버릇이 없고 방자하니 덕이 있는 이를 찾아서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우자 는 민주적 건국논의에서도 충분히 감지되는 일이다.

 

나. 알평(謁平)은 <거륵한 평천하자(平天下者)>의 뜻

이청원(李靑原. 표암학술원장)은 <알평(謁平)>을 이름으로 보지 않고 존호(尊號)로 보았다. 그는 ≪표암(瓢巖. 밝바위)에 관한 고찰≫이라는 연구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석명(釋明)하고 있다.

알평께서 북만주의 신조선(朝鮮)의 왕족으로서 아직도 백성의 존경을 받는 처지에서 일단(一團)의 무리를 이끌고 반도 남부로 내려와 6촌을 이루었고 그들을 선도하여 옛날의 신조선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사로국(斯盧國)을 창업하고 그 영주(英主)로서 13년을 다스려서 도덕사회로 성숙시킨 뒤에 임금을 추대하여 왕국을 출범시켰으나 왕이 어리므로 6촌장을 거느리고 섭정하면서 1,000년 왕국의 기틀을 다진 분.......이만하면 사로국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후세의 신라에서도 <거륵한 구세주>로 모실만 하지 않은가?

알평(謁平) 의 알(謁) 은 거룩한 신성한 의 뜻이며 평(平) 은 잘 다스린다 는 뜻이다.『대학(大學)』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는,평천하(平天下)를 혈구지도(絜矩之道) 라고 하고, 노인을 정성 껏 모시는 것을 효(孝) 라 하고 어른을 받드는 것을 제(悌) 라 하며 외로운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자(慈) 라 하니 이 삼덕(三德)을 항상하는 것이 곧 혈구지도 이며 이것이 평천하 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알평공의 치적(治績)이 어찌 효․제․자의 삼덕에만 머물겠는가? 인문(人文)의 극치(極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완성 을 실현하고 그 꽃으로 상징되는 화백 을 제도화하였으며 부족국가를 다시 왕국으로 승화시켜서 옛날의 <신조선>을 부활시켰으니―야만을 개명(開明) 으로 순화한 것도 그의 가르침에 의함이요 화백 도 그의 지도력에서 나왔으며 사로국이나 신라의 건국 도 그의 탁월한 지도력의 소산(所産)이었으니 이 어찌 <겨례의 아버지>요 <거륵한 평천하자>가 아니겠는가.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시조에게 <이씨(李氏)>가 하사되고 법흥왕 23년(서기 526년)에 문선(文宣) 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태종무열왕 3년(서기 739년)에 은열왕(恩烈王) 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 순조 6년(1806년)에 신라를 건국하고 박혁거세왕을 추대한 사실(史實)을 새긴 유허비를 금강산 표암봉(瓢巖峰)에 세웠으며 서기 1925년에 표암재(瓢巖齋)를 건립하였고 1971년에 알평시조의 묘우(廟宇)인 악강묘(嶽降廟)가 국고지원으로 건립되었다.

 

다. 시조 알평공의 6가지 사적(史蹟)

첫째는 <사로국(斯盧國)>을 탄생시킨 일을 들 수가 있다.

둘째는 <화백 제도>를 창안하여 전통화했다는 것이다.

세째는 <한가위(秋夕)>가 알평공의 마당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삼국 사기』유리왕 9년에는,6부를 둘로 나누어 각각 왕녀에게 거느리게 하고 7월 16 일부터 길삼을 하게 하여 8월 15일 그 결과를 심사하여 진 편에서 이긴 편에게 음식을 대접했는데 그때에 진 편의 한 여인이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를회소 회 소(會蘇 會蘇) 라고 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슬프고 고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노래 를 <회소곡(會蘇曲)>이라고 불렀다. 뒷날 이 잔치를가배(嘉俳) 라고 하였다. 고 있다.

<가배>는 뒷날 < ㅂ>이 탈락하여 <가배→가애→가우→가위>로 와전(訛傳)하 여 오늘날의 <가위>가 되고 이것이 <한가위> 곧 추석(秋夕)이 된 것이다. 그러 므로 알평공의 집 마당에서 <한국의 한가위>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넷째는 유두(流頭)의 풍속이 알평공의 영지(領地)인 알천(閼川)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다.『삼국유사』에는 건국회의가 열리던 날 6촌장들이 각각 자제를 거느리고 알 천에 나왔다고 했는데, 이 날은 3월 1일의 계욕일(禊浴日) 이므로 전 6촌민이 물가에 나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며 빨래도 하고 겨우내 정체(停滯)되었던 때와 불운을 몰아내고 깨끗한 심신으로 새봄을 맞는 의례(儀禮)를 치룬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이 <계욕>의 민속은 없어지고 그 대신 <유두(流 頭)>로 대체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유두 의 원형으로 서의 계욕 이 기원전 69년에 이미 알천에서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일이다.

다섯째는 박혁거세가 6촌 가운데 알평공의 영지인 양산촌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 다. 6촌은 일종의 부족국가였다. 모든 문제는 6촌장이 모여서 의논하지마 는 두 가지 한계는 분명히 고수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하나는 종 족의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영역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다른 촌의 영역을 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삼국사기』에는,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 伐公)이 양산촌을 바라보니 양산촌의 나정(蘿井) 곁의 숲 사이에서 말 울음소리가 나므로 가서 살펴보니 알이 있으므로 알을 깨고 영아(嬰兒)를 거두어다가 길러서 10여세가 되자 임금으로 세웠다고 하였다.

6촌의 영도자는 알평공인데 제2촌의 촌장이 제1촌의 존장이요 6촌의 영 도자인 알평공의 허락 없이 양산촌에 몰래 숨어들어올 수가 있는가? 또 나중에 임금이 될 영아를 양산촌장의 허락 없이 거두어다가 몰래 길러서 임금으로 추대할 수가 있을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고쳐 쓰고 있다. (건국회의를 마치고 모든 촌민이) 알천(閼川) 언덕에 올라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촌의 나정 곁에 전광(電 光)이 드리웠으므로 모두 내려가서 살펴보니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니 옥동자 가 나오므로 북천(北川)에 씻었더니 몸에서 광채가 났다. 때 마침 알영(閼英) 우 물가에 나타난 계룡에게서 여아(女兒)를 얻었으므로 6촌민들이 궁실(宮室)을지 어서 두 성아(聖兒)를 기르고 13년 뒤에 혁거세는 임금으로 추대하고 알영은 왕 비로 모셨다 고 있다.

『삼국유사』는『삼국사기』보다 136년 뒤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삼국 사기』에서 빠진 것을 보태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역사서이다. 그러므로박 혁거세를 소벌공이 데려다가 길렀다 는『삼국사기』의 기록이『삼국유사』에 의해서 이미 이와같이 분명히 고쳐졌다.

여섯째는 알평공이 내려온 밝바바위(瓢巖)가 <밝사상> (단군신앙)의남부연원(南部淵源)

의 구실 을했다는 점이다. 밝사상 은 신라만의 독점물은 아니지마는 고구려

와 백제, 그리고 그 뒤의 발해까지 모조리 멸망했으므로 밝사상 은 단절의 위

기를 만났었는데 신라가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서 고려에 전수하고 고려가 다

시 조선에 전해주어서 오늘에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최초의 구실을 한 것이 양산촌이고 그 상징적인 표상이 바로 <밝바위(瓢巖)>인 것이다. 박혁거세 의 박 을 비롯하여 빛 과 밝 을 의미하는 용어를 신라의 왕명(王名)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례는 도처에서 산견된다.

이상과 같이 알평공이 다스리던 알천양산촌은 대저 6가지의 대단한 사적(史蹟)을 지닌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3.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

가. 인멸된 세계(世系)

시조 이후의 세계를 밝힌 자료(資料)는 선대(先代) 이래로 채택하지 않고 신라 말에 소판(蘇判)에 이른 거명(居明)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제1세로 정하고 하고 있다. 2세 금현(金現)은 재상으로 병부령을 겸하였으며 3세 금서(金書)는 고려초에 중원태수와 호부랑중에 이르고 4세 윤홍(潤弘)은 재상에 이르렀으니 대대로 거공석학(鉅公碩學)이 줄을 이어서 나와서 가문을 빛냈던 것이다.

 

나. 중흥조(中興祖) 열헌공(悅軒公)과 두 편의 하시(賀詩)

1) 중흥조 열헌공과 3자 9손

거명(居明)의 15세(世)인 문하평리 열헌(悅軒) 핵(翮)에 이르러 3자 9손이 모두 이름을 떨쳤으므로 열헌공을 이문(李門)의 중흥조(中興祖) 로 받들게 된 것이다. 공은 3자를 두었는데 인정(仁挺)․진(瑱)․세기(世基)인 바, 어머니이신 김해김씨가 서사(書史)를 친히 가르쳐서 모두 세상에 크게 쓰이게 하였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장자 인정은 문과를 거쳐 문하평리에 이르고 차자 진과 계자 세기는 충렬왕 6년(서기 1280)의 친시(親試)에서 갑과(甲科)에 각각 제2, 제3 위에 오르니 임금이 황패(黃牌)를 내렸으므로 세인(世人)이 이를천장급제(天場及第)(하늘의 과장(科場)에서 급제한 것) 라 하였고 그 뒤에 인정의 아들 부(榑)와 교(樛), 진의 아들 관(琯)과 제현(齊賢), 세기의 아들 천(蒨) 등 5명이 모두 성균시에 장원을 하니 세상사람들이 <갑과손(甲科孫)>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고 인정의 두 아들과 진의 세 아들 세기의 네 아들 등 열헌공의 아홉 손자가 모두 문과에 등제하니 당대의 명유(名儒)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세과(世科. 대대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뜻) 라고 극찬을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경주이씨 가문이 고려의 현족(顯族)으로 부상한 것이다.

 

2) 두 편의 하시(賀詩)

묵헌(墨軒) 민지(閔漬)가 동암공(東庵公(瑱))에게 바친 하시(賀詩)에

 

華萼三家五榜魁 한 꽃받침 세 집에서 다섯 손자가 으뜸을 하니

人言皆是謫仙才 사람들이 모두 이백(李白)의 재주라 하네

知公積善眞無敵 공(公)의 적선(積善)은 진실로 대적할 사람이 없구려

獨見年年慶席開 해마다 경사스런 잔치를 홀자서만 보게 되시니

 

문량(文良) 조간(趙簡)이 역시 동암공(東庵公)에게 드린 하시(賀詩)에

 

具慶提衡罕見聞 형제가 과거에 들어 집안 잔치를 연이어 엶은 드믄 일인데

得賢還勝舊龍門 어진이를 얻는 것은 (이 친시(親試)가) 옛 제도보다도 도리혀 낫구려

觴中酒可重重見 잔 속에 술은 거듭 거듭 채워지는데

堂上親皆兩兩存 당상에는 친부모님들이 모두 쌍쌍히 계시는 구려

幾歲蘭蓀相襲馥 난손(蘭蓀. 난초의 싹)같은 자손들의 향기 잇기 몇 해이던가

一番桃李恰開繁 도리화(桃李花) 한 번 피니 가문이 활짝 열리는 구려

悅軒喜氣那容說 열헌공(悅軒公)의 기뻐하는 모습을 어찌 (임금께) 아첨한다 하는가

人道新添甲科孫 사람들이 갑과(甲科)의 자손 이라는 별명을 새로 붙여 주었는데

 

묵헌은 첨의정승을 지낸 학자이고 문량은 첨의시랑평장사를 지낸 문호(文豪)였다. 두 분이 함께 거듭하는 과거 급제의 자축 잔치에 참석하고서 느낀 바를 시로 읊어서 동암공에게 드린 것인데 이 두 편의 시는 경주이씨 문중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장자 인정(仁挺)과 그의 아들

인정(仁挺)은 호를 성암(誠菴)이라 했는데 일찍이 문과에 장원하고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충렬왕 2년에 우정언으로 있을 때 임금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벼슬을 주려하므로 서명을 하지 않아서 임금의 노여움을 샀다. 뒤에 누진하여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에 공(功)이 없이 벼슬을 받는 자는 모두 서명을 하지 않으니 임금의 미움을 받아 파직이 되었다가 참지정사 이지저(李之氐)의 변호로 복직되었다.

사관(史官)이 기록하기를 공(公)은 굴강(倔强)하야 모든 사람들이 벼슬을 받을 때에 반드시 그 공과(功過)를 따져서 처결할 뿐 (왕명이라 하여도) 구차하게 서명하지 않았다 고 있다. 불서고신(不署告身.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는 일)으로 누차 왕의 미움을 샀으나 굽히지 않으므로 그 곧은 성품을 세상사람들이 칭송하였다.

공의 차자 규(樛)는 덕원부사(德原府使)를 거쳐 우헌납에 이르렀을 때 충숙왕 원년에 임금이상왕(上王. 충선왕)이 평소 총애하는 승려 경린(景麟)과 경총(景聰)에게 벼슬을 내리려 할 때에 우헌납 이조은(李朝隱. 공의 이름)이 서명을 해주지 않아서 조홀도(祖忽島)로 유배되었으나 불러서 다시 벼슬을 주라. 고 하였다. 공은 간원(諫院)에 있는 동안 위로는 임금의 잘못은 반드시 깨우쳐드리고 아래로는 신하들의 간사한 작태를 억눌러서 아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였다.

부자가 모두 강직한 충신들로서 왕의 위엄에도 굽히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4) 차자 진(瑱)과 아들 익재공파의 <팔별(八鼈)집>

열헌공의 차자 동암(東庵) 진(瑱)은 검교정승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는데 시문(詩文)으로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그의 둘째 아들 익재(益齋. 齊賢)는 고려말에 네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오른 대정치가이고 학자이며 또한 시인이었다.

<팔별집>은 익재공의 7대손인 공린(公麟)의 현몽(現夢)에서 시작된다. 공린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의 취객(娶客)이 되었는데 혼례를 치룬 첫날 밤의 꿈에 용왕(龍王)이 나타나서내 여덟 아들이 지금 사경(死境)에 이르렀으니 어서 구해달라. 그대가 내 여덟 아들을 구해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 라고 하므로 꿈을 깨어 일어나보니 한 밥중이었다. 잠든 신부를 흔들어 깨서 물어보니 신부의 말이 어머니께서 며칠전에 사위에게 먹이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항아리에 넣어두었다 고 하므로 둘이서 8마리의 자라를 꺼내서 10여리 밖에 있는 호수에 방생(放生)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한 마리가 죽었다고 한다. 얼마후에 공린은 박씨부인과의 사이에 8형제를 두었는데 3남 원(黿)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죽으니 자라 8마리를 방생하러 가는 도중에 죽은 한 마리가 그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8형제를 둔 것은 용왕의 보은(報恩) 때문이라 여겨서 이름을 모두 자라, 거북, 고래, 곤(鯤) 등 물고기의 이름을 붙여서 오(熬)․구(龜)․원(黿)․타(鼉)․별(鼈)․벽(鼊)․경(鯨)․곤(鯤) 이라 했는데 한결같이 글을 잘 지어 <8문장>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17대가 지났으나 아직도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하니 8별을 자라의 환생(還生)으로 숭봉하는 가통(家統) 때 문이리라.

공린은 박팽년의 서랑(壻郞)이라는 이유로 벼슬 길이 막혔었다가 어머니 님양홍씨(南陽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되면서 30여년만에 길이 터져서 무과(武科)를 거쳐 현령(縣令)에 이르렀으나 3자 원(黿)이 사화(士禍)로 인하여 죽자 청주에 유배되었는데 반정(反正) 후에 신원(伸寃)되었다.

구(龜)는 문과에 급제, 좌랑에 이르렀을 때에 아우 원의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충주목사에 이르렀다. 원은 문과를 거쳐 호조좌랑에 이르렀는데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 의 시호를 주자고 건의한 일로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옮기고 갑자사화 때에 처형되었는데, 반정후에 신원이 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서되었다.

 

5) 계자 세기와 국당공파의 <팔정(八廷)집>

열헌공의 계자 세기는 호가 송암(松巖)이었고 대제학을 거쳐 검교정승에 이르렀고, 그의 장자 국당(菊堂) 천(蒨)은 문하시랑평장사에이르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손 달충(達衷)은 감찰대부를 거쳐 호부상서로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팔관화(八關會)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밀직제학이 되고 신돈(辛旽)이 주살된 후에 계림부윤이 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는 효종을 도와 북벌(北伐)을 추진하던 세칭 <이완대장(李浣大將)>이 가장 걸출하다. 그는 무과를 거쳐 경기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절도사에 이르고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효종의 명을 받들어 북벌계획 을 추진하였다. 어영대장을 거쳐 훈련대장에 이르러 신무기의 제조와 성곽(城郭)의 보수를 하면서 청(淸)과의 일전(一戰)에 만전을 기했으나 효종의 급서(急逝)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후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며 함경도병마절도사였고 형조판서에 이른 충무공 수일(守一)이다.

국당의 맏아들 판병부사 경중(敬中)의 후손 가운데 세종조에 청백리(淸白吏)에 책록된 점보(廷俌)가 있고 정보의 후손 중에 증영의정 탕(宕)이 있는데, 여덟 아들을 둔데다가 모두 현달하여 <팔정(八廷)집>이라고 불리웠다. 이 8형제 가운데 정암(廷馣)․정형(廷馨)의 형제가 유명하였다. 형제가 모두 대사간을 지냈고 명신으로 꼽히었는데 형은 임진왜란에 의병장이 되어 여러 곳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아우는 성리학의 대가였으나 형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나아가서 공을 세웠으며 이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동각잡기(東閣雜記)』․『지퇴당집(知退堂集)』등이 전한다.

 

6) 계자 세기의 후손 상서공파의 <오신(五臣)집>과 <백사(白沙)집>

송암공(松巖公)의 3자 과(薖)는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나 이태조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공훈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과의 5대손 성무(成茂)는 안동판관, 증이조판서였고 5자를 두었는데, 인신(仁臣)․의신(義臣)․예신(禮臣)․지신(智臣)․신신(信臣)이었으며 모두 이름을 떨쳤으므로 세인들이 <오신(五臣)집>이라고 불렀다.

인신은 지의금부사에 이르고 증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역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자 몽린(夢麟)은 수군절도사․병마절도사를 거쳐서 포도대장. 지돈녕부사에 이르고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인종~명종대의 명장(名將) 으로 이름을 떨쳤다. 몽린이 지돈녕부사로 있을 때 명종(明宗)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친히 관람하시는데 매가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임금의 거처)의 위를 맴돌아 날면서 차려놓은 어선(御膳. 임금이 드시는 음식)을 노리므로 임금이 매우 싫어하여매를 쏘아 떨어뜨리라 라 하니 한 대신(大臣)이 아뢰기를이몽린(李夢麟)만이 쏠 수 있아옵니다. 하였다. 몽린(夢麟)이 명에 따라 임금 앞에 나와서 여쭙기를매의 어디를 쏘리까? 하므로 임금이 괴이쩍게 여기고 매의 등을 쏘아보라. 하였다. 그러자 공이 화살 두 대를 시위에 먹이어 연거푸 쏘았다. 한 대가 매의 오른쪽 날개를 맞히는 순간에 놀래어 몸을 뒤집으니 다음 화살이 등에 꽂히었다. 매가 땅에 떨어지므로 주어다가 살펴보니 과연 화살이 등에 꽂히었다. 임금을 위시하여 이 광경을 본 신료(臣僚)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몽린의 큰 아우 몽기(夢麒)는 통정대부였고 둘째 아우 몽원(夢黿)은 병마절도사․어모장군이었으며 셋째 아우 몽서(夢犀)는 청도군수(淸道郡守)였고 넷째 아우 천휴당(天休堂) 몽규(夢奎)는 반궁(泮宮. 국학(國學) 곧 성균관)에서 수학(修學)할 때 어린 유생들이 핏대를 올리며 논쟁하는 것을 보고 환로(宦路)의 꿈을 접고 보령(保寧)으로 낙향하였는데 얼마 뒤에 인종(仁宗)이 승하하므로 애통하기 수월(數月)에 숨을 거두니 경종(景宗) 1년에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하고 사액(賜額)했으며 증성균관좨주․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다.

몽린의 손 용근(庸謹)은 군자감정이었고 현손 문재(文在)는 문과에 들어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이르고 문빈(文彬)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였으며 5대손 세현(世賢)은 문과에 든 뒤에 예조좌랑에 이르렀을 때에 기주(記注)에 뽑히었으나 당시의 재상의 미움을 사서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내쳐져 임지에서 죽었다. 세현은 일찍이 유생으로 율곡(栗谷)․우계(牛溪)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공박하는 봉장(封章)을 올렸고 기사화(己巳禍)에는 숙종의 왕비 폐출(廢黜)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린 강의(剛毅)․충절(忠節)의 인물이었다.

5신 가운데 둘째 분인 의신(義臣)은 진사로 불사(不仕)하였으나 5대손 수종(秀宗)은 병자호란 때에 3학사와 함께 호지(胡地)에 끌려가서 매운 위국단충(爲國丹忠)을 보이었고 그의 손 천복(天福)은 원종공신으로 어모장군에 이르렀다.

5臣 가운데 가장 현달한 집안은 셋째 예신(禮臣)의 문중이었다. 장자 몽윤(夢尹)은 장단부사(長湍府使)에 이르고 증직제학이었으며 차자 몽량(夢亮)은 우참찬에 이르렀으며 저 유명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바로 몽량의 둘째 아들이다. 4신 지신(智臣)은 선무랑에 그쳤으나 율곡과 도교(道交)를 맺었었고 5신 신신(信臣)의 아들 희관(熙寬)은 가선대부였고 증손 무춘(茂春)은 어모장군이었으며 현손 덕수(德壽)는 공조참의였고 5대손 세훈(世薰)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이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백사(白沙)집>은 예신(禮臣)의 차손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의 가계(家系)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은 임란 중에는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아 왜노(倭奴)의 침략을 승리로 이끌었고 난후에는 호성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니 성만(盛滿. 벼슬과 명예가 가득한 것) 이라 하여 선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양하여 대신(大臣)의 퐁도(風度) 를 보였다.

공의 현손 광좌(光佐)와 태좌(台佐)는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고 태좌의 아들 종성(宗城)은 영의정이었으며 6대손 경일(敬一)도 좌의정이었고 9대손 유원(裕元)은 영의정이었다.

광좌(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광좌의 8촌형인 태좌(台佐) 또한 소론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종성(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가 가장 성시(盛時)를 누렸다.

오천(梧川) 종성(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 莊獻世子) 묘정에 배향되었다. 영조 3년 증광문과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도승지(都承旨)∙형조판서(刑曹判書)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영조 29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원(裕元)은 대원군(大阮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당했다가 대원군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捕)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귤산문고(橘山文稿)’등 저술을 남겼다.

역시 9대손 유승(裕承)은 좌찬성이었는데 6형제를 두었던바 건영(建榮)․석영(石榮. 유원의 아들로 출계)․철영(哲榮)․회영(會榮)․시영(始榮)․소영(韶榮)이었는데,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6형제가 함께 솔가 망명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특히 회영과 시영은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시영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재무총장․의정원장을 맡아 일본의 박해 속에서 임정을 지켰으며 광복 후에 5형제를 이국(異國)의 땅에 묻고 참담한 심경으로 홀로 환국한 시영은 국명(國名)을 대한(大韓) 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하는 등 정부수립을 주도하고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임기 1년을 남기고 이승만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맞서 사퇴하고 이듬해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의 성원에 못이겨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 인물론

가. 익재공(益齋公)과 고려의 존망

이제현(李齊賢. 충렬왕 13(서기1287)~공민왕 16(서기1367))은 고려말의 정치가이며 성리학자였고 원(元)의 위협속에서 기울어가는 고려의 사직(社稷)을 혼자서 버텨낸 위인이었다. 자는 중사(仲思),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검교정승 진(瑱)의 아들이다. 충렬왕 27년(서기1301)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문과의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예문춘추관에 들어갔다. 성균악정에 이르렀을 때에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부르므로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의 명사들인 요수(姚燧)․염복(閻復)․조맹부(趙孟頫)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심오해졌으며 이 때에 진감여(陳鑑如)가 공의 초상화를 그렸고 원(元)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이 그림과 글씨가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되어있다.

충숙왕 10년(서기1323)에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이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省)으로 만들어달라 고 원나라에 간청하니 원나라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고려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온 조정이 들떠서 후속조치에 여념이 없는데 공은 분연히 일어나 도당(都堂. 원나라의 의정부)에 글을 보내서 고려 400년의 사직(社稷)이 이로써 무너진다고 개탄하고 유청신 등의 청원이 부당함을 이로정연하게 설명하여 고려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위급을 구하였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충선왕이 서번(西蕃)에 귀양가게 되자 함께 따라갔으며 가고 오는 과정에서 밀직사사․첨의평리․정당문학․삼사사 등이 내려졌다.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정승 조적(曺頔) 등이 심왕(瀋王) 고(暠)와 공모하여 모반하다가 잡혀죽자 그의 무리들이 연경(燕京)에 남아서 충혜왕을 음해하므로 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잘 무마하였으며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우정승을 맡고 정동성사를 겸하였다. 그후 원종공신 조일신(趙日新)이 시기할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뒤의 조일신의 난리 에 화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후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6년( 서기1357)에 벼슬을 떠났고 왕명으로 고려의 실록을 수찬(修撰)하고 종묘와 위패의 서차(序次)를 정했으며 사후에 공민왕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저서로는『익재난고(益齋亂藁)』․『낙옹비설(櫟翁稗說)』․『익재집(益齋集)』등이 있다.

공은 당대의 문호(文豪)였으며『익재난고』소악부(小樂府)에는 당시의 민요 17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수록되어 있는데 국문학계에서 고려시대의 가요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齎)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라고까지 평가했다.

 

나. 백사공(白沙公)과 임진왜란

이항복(李恒福. 명종 11년(서기 1556년)~광해 10년(서기 1618년)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의 대신이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백사(白沙)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공의 아버지 몽량(夢亮)은 3조판서를 지냈고 당대의 명경(名卿)으로 칭송되던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악동(惡童)으로 골목대장이었으나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학문에 열중하더니 뒤에 학궁(學宮)에 들어가 더욱 정진하여 이름을 떨치니 당시의 재상 권철(權轍)이 듣고 만나보고서 손녀사위를 삼았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이 때에 만나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선조 13년(서기 1580년) 문과에 급제한 다음 호당(湖堂)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호조참의에 이르렀을 때에 왕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공평하게 다스려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당시 사화(士禍)가 일어나 대신 정철(鄭澈)이 수괴(首魁)로 몰리어 찾아가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거리낌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 때에 정철의 죄를 태만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의 신분으로 임금을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開城)에 이르렀으며 이 때에 이조참판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두 왕자를 호위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때에 조정(朝廷) 대신들의 공론은 임금이 함흥(咸興)으로 피란해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공은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寧邊)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임금의 장전을 한음과 교대로 찾아가서 간청한 끝에 새벽녘에야 윤허(允許)를 받았다. 그러자 함흥으로 가자고 주장하던 대신들이 부모의 병이나 자신의 노구(老軀)를 이유로 호종(扈從)하기를 꺼리므로 공이 분연히 나서서 임금의 수레를 붙들고 진두지휘를 하였다.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가서 명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고 명나라의 대병(大兵)을 조선에 이르게 하였다.

임진∼정유의 전쟁 중에 병조판서를 5번이나 맡으면서 침략자를 소탕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선조 31년(서기 1598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부원군을 받고 정응태(丁應泰)가 명나라에 무고(誣告)한 사건을 바로잡기 위하여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특유의 해박한 문장으로 해명하니 명나라 황제가 오해를 풀고 정응태를 파면하였다.

이어서 영의정에 오르고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때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므로 그의 무죄를 변호하다가정철(鄭澈)의 당(黨) 이라는 혐의를 받으니 자진하여 영의정을 그만두었는데,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거듭 불렀으나 성만(盛滿. 벼슬과 명예가 가득함) 이 되었으니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하였다. 선조는 거듭 부르고 공은 응하지 않으니 조정이 이 일로 어스선하여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때에 한 벼슬아치가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싫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자꾸 부르시는지 모르겠다. 는 불평이 선조의 귀에 들어갔다. 선조가 진노하여대신(大臣)을 능멸하는 자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찾아보라 고 하며 그 길로 청풍군수로 내쳐졌다. 이 뒤에도 공은 끝내 복직하지 않았으나 예우는 예전과 같이 했고 큰 일이 있을 때에는 공의 자문을 받았다.

광해군(光海君)이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하려 하므로 변호하다가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고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자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에 귀양가서 거기에서 죽었다. 후에 관작이 환급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포천(抱川)에 예장했고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에 사액(賜額)되었다.

공은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는 40여년 동안 당쟁(黨爭)에서 초연하였다. 저서는『백사집(白沙集)』2권․『북천일록(北遷日錄)』2권․『주소계의(奏疏啓議)』2권․『사례훈몽(四禮訓蒙)』1권․『노사영언(魯史零言)』15권 등이 있다.

다. 종중을 빛낸 거인(巨人)들(경주이씨조상인물)

1) 절의(節義)∙염결(廉潔)의 가풍(家風)

경주이씨(慶州李氏)의 가통(家統)에 한 특징이 있으니 겸양이 남다르고 처신에 엄격하여 청백(淸白)과 절의(節義)의 가문이었다. 조선조에 만도 53명의 청백리(淸白吏)가 녹선되었다. 이항복(李恒福), 이수일(李守一), 이유태(李惟泰), 이경일(李敬一)등은 청백리였으며 이존오(李存吾), 이시영(李始榮)은 절의로 유명하다.

고려조의 절의지사(節義志士)로는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와 역시 고려말의 충신 이수(李蓨)를 들 수가 있다.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도(徒)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쳐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율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대사성을 추증했다.

 

역시 고려말의 충신 이수는 검교정승 송암 세기의 제4자이고 국당 천(蒨)의 막내동생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에 이르렀을 때에 고려가 망하므로, 모두 고려를 등지고 신왕조로 발길을 돌리는데 공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안고 전라도 함라에 있는 갓점산에 은둔하였다. 공은 그 산속에 서실(書室)을 얽어 마련하고 거기에서 독서도 하고 지금은 없는 고려사직의 원혼들을 달래며 제향을 지냈다고 한다. 밖에 나온 일이 없으므로 초근(草根) 목피(木皮)로 목숨을 이을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마는 도대체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몸을 가리웠으며 무엇을 덮고 어디에서 잤을까? 세속인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자연의 삶속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30유여년을 보내다가 표연히 자취를 감추었으니 실로 만고의 충신이 아닐 수가 없다. 공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어서 뒤에 후손들이 그 산 아래에 단(壇)을 설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말(韓末)에 공의 단(壇) 앞에 세운 비의 표면에는 ≪해동수양(海東首陽)≫이라는 표제가 새겨져있다. 세인들은 공이 은둔한 이 산을 백이숙제(伯夷叔제)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중국의 수양산(首陽山)에 비유한 것이다.

 

2) 장군(將軍) 및 의병장

경주이문에서는 유달리 무인이 많이 났으나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소개하기로 하면 인종~명종간의 명장이었던 병사 몽린(夢麟)을 비롯하여 병사 충무공 수일(守一)과 훈련대장이며 우의정이었던 완(浣) 그리고 삼도수군 통제사 규철(圭徹)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극복(克福), 윤(潤), 承曾과 병자호란때의 이억(李億)장군 한말의 의병장들인 규태(圭泰)․규응(圭膺)․상구(相龜) ․ 중국군 육군중장 상정(相定)과 근래의 국방장관이며 육군중장이었던 종찬(鍾贊)․국방장관이었고 재향군인회장이며 육군대장인 상훈(相薰) 등을 들 수가 있다.

3) 학자․문인의 맥

추천할만한 학자로는 고려조의 익재(益齋) 제현(齊賢)․조선조의 천휴당(天休堂) 몽규(夢奎)․초려(草廬) 유태(惟泰)․양와(養窩) 세구(世龜)를 들 수가 있고 문인으로는 고려조의 동암(東庵) 진(瑱)․송암(松巖) 세기(世基)를 비롯하여 고려의 명상 익재 제현․고려조의 충신 석탄(石灘) 존오(存吾)․조선의 충신 천휴당 몽규를 비롯하여 조선의 명상 백사 항복(恒福)․근래의 구국시인 상화(相和)․시조계(時調界)의 별 영도(永道)와 호우(鎬雨)의 남매에 이르기까지의 문맥(文脈)을 들 수가 있다.

 

4) 독립운동의 맥

독립운동의 맥은 헤그밀사의 정사(正使)였고 광복군 정통령(正統領)이었던 보재(漙齋) 상설(相卨)을 비롯하여 6형제 60여명을 이끌고 솔가 망명한 우당(友堂) 회영(會榮)․성재성재(省齋) 시영(始榮)을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은 만주에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고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수천명의 왜적을 섬멸하였고 뒤에 3․1운동을 지휘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성재공은 재무총장과 법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호에 진력하다가 광복후에 5형제를 모두 이국(異國)의 땅에 묻고 홀로 돌아와서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하고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밖에도 규완(圭完)․규학(圭鶴)․봉우(鳳雨)․일범(一凡)․항발(恒發) 등 50여인이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5) 종교계의 거인들

일찍이 고려 인종 때에 도교(道敎)의 도사(道士)인 중약(仲若)은 임금을 달래어 궁중에 복덕궁(福德宮)을 신설하게 하여 왕실에 도교(道敎)를 받아들이게 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의 법을 중국의 송나라에 전한 최초의 거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천주교의 전파에 공헌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 벽(檗)을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조 3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맹자봉 기슭 천진암(天眞庵)에서 권철신∙일신(權哲身∙日身)형제, 정약전∙약종∙약용(丁若銓∙若鍾∙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熏)등 10여명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학문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믿음으로써 서교(西敎, 天主敎)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 천주교, 천주교회의 출발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이 천진암(天眞庵)강학회를 시발로 1785년 숨질때까지 7년 동안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신앙을 전파했다.

1785년 1월 그는 서울 명례(明禮)방(현 明洞)에 사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寓)의 집에서 권철신∙일신형제,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등 신자들과 예배를 보다 붙잡혔다. 그의 아버지는 사학(邪學)으로부터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이르고 야단치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이벽(李檗)은 신앙과 효도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던 끝에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식음을 끊었다. 기도와 독서만으로 버티기 10여일 만에 탈진한 그는 쥐통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최근 천주교에서는 잊혀진 그의 묘소를 포천(抱川)에서 찾아내 발굴, 천진암(天眞庵) 아래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칼날 아래의 순교보다도 더 거룩한 순교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의 맥을 이은 규채(圭彩)와 광복 후까지 대종교의 대표로 맥을 잇고 교리를 정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성재 시영을 잊어서는 안 될 거이다. 그리고 근년에 명성을 떨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 성철(性澈)이 있다.

 

6) 궁중악의 전통

궁중아악(宮中雅樂)의 맥을 온전히 이어온 가문은 인식(寅植)의 집안이었다. 공은 거문고의 대가였는데, 공의 아들 원근(源根)은 피리의 일인자였다. 그리고 공의 손자 수경(壽卿)은 거문고의 달인이었으며 궁중정재(宮中呈才)에 뛰어나 국립국악원의 춤은 전적으로 공의 전수에 의함이고 악장(樂章)도 공이 지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오늘날의 <궁중악(宮中樂)>은 그에 의하여 전승, 교도(敎導)된 것이다. 공의 증손 병성(炳星)은 양금과 피리로 당대에 겨를 사람이 없었고 공의 현손 동규(東圭)는 가곡에 뛰어났다. 이렇듯 5대가 아악의 대가로서 각각 특유의 장기(長技)를 후세에 전수하여 오늘날의 궁중악이 인식(寅植)의 가문에 의하여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지금은 국민가요가 된 <눈물 젖은 두만강>에 대해서이다.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누구의 곡인지를 아는 이는 드믈 것이다. 이 곡을 작곡한 분이 바로 경주이씨 문중의 시우(時雨)이다.

 

7) 화가․영화감독․바둑계의 왕자

역사상 많은 화가와 서예가가 있었을 것이지만, 몇 분만 소개하기로 하겠다. 우선 연산군에게 불의의 화를 입은 종준(宗準)을 아마추어 화가의 초기인물로 보고 싶다. 그 다음으로는 선조 때의 해룡(海龍)이 글씨에 뛰어났으며 중국의 남종화(南宗畵)가 지니고 있는 문인화(文人畵)의 기법을 최초로 조선에 도입한 분으로 하곤(夏坤)을 들 수가 있다. 공은 저 유명한 좌의정 경억(慶億)의 손자이고 대제학 인엽(寅燁)의 큰 아들이기도 하다. 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고금의 그림을 평한 평론집『두타초(頭陀草)』가 전한다. 다음으로는 헌종~순조대의 희수(喜秀)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런 가운데 철종~고종대에 글씨를 가업(家業)으로 하는 집안이 나타났다. 지금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에 <대한문(大韓門)>이라는 현판(懸板)을 경주이씨 문중의 종태(鍾泰)가 썼다.

 

비록 그림이나 글씨는 아니지만 역시 시각예술(視覺藝術)의 하나인 영화촬영기술의 개척자이며 최초의 감독이었던 명우(明雨)를 꼽지 않을 수가 없고 그 다음으로는 그의 형이었던 필우(弼雨)가 최초의 영화촬영기사였다. 또 같은 시기에 작가와 영화감독을 겸했던 규환(圭煥)도 한국영화의 초기 공로자이다.

그리고 우리가 빼놓아서는 안 될 국보적 존재인 바둑의 황제 창호(昌鎬)가 있다. 그는 10대의 어린 나이로 한국 뿐 아니라 동양의 바둑계를 석권했으며 나아가 세계에서 무적의 패자(覇者)로 우뚝 선 것이다.

 

라. 독립운동의 선구자

1) 보재(漙齋) 이상설(李相卨)

이상설(相卨)은 서기 1870년~1917에 출생하였는 바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漙齋), 충북 진천(振川) 출신으로 행우(行雨)의 장남이며 7세 때 용우(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학문을 배웠다. 헐버트(Hulbert, 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불어를 익히고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고종 31년(서기 1894) 문과에 급제하고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만한 학자라는 평을 받았다. 2년 후에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 교관․탁지부 재무관 등을 거쳐서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상소 곧 <일인요구 전국 황무지 개척권 불가소(日人要求 全國 荒蕪地 開拓權 不可疏)>를 올렸는데 고종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인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1905년 학부협판과 법부협판에 보임되고 11월초에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에 올랐다. 1905년 11월에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 등 5적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려할 때 공은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였으므로 회의에 참석하여 조약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제지로 끝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을사조약은 강제로 체결되었으나 고종이 인준하지 않았음을 알고 공은 5적을 즉시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나아가서 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의 원로대신을 소두(疏頭)로 하는 백관반대상소(百官反對上疏)와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리도록 주선하였다. 11월말에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종로로 나와서 울면서민족의 궐기와 결사항일투쟁 을 호소한 다음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06년 봄에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8월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함께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월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특파되었다. 이때에 공이 정사(正使)였고 부사(副使)로는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이 보좌했다. 일행은 현장에 도착하여 국권의 회복 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본의 간악한 선동에 의하여 회의에 참석조차 거부되는 참경에 이르렀으나 공은 대한제국의 현황과 주장을 밝힌 성명서 ≪공고사(控告詞)≫를 헤이그에 모인 세계 각국의 대표에게 보내는 등 국권회복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일행 가운데 이준은 불행하게도 감기로 현지에서 죽었다.

그 뒤에 헐버트․이위종․송헌주(宋憲澍)․윤병구(尹炳球) 등을 대동하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보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역설하였고 더불어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애국활동을 문제삼은 일제는 그들의 주구(走狗)들을 시켜서 국내에서 공을 궐석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1908년에는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의 조야에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각지에 산재해 있는 교포들을 규합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끌어올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한 결실로서는 동년 8월에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를 꼽을 수가 있고 이듬해 4월에 열린 <국민회 제1회 이사회>를 들 수가 있다. 이때에 공과 함께 재미교포의 애국운동을 위한 조직화사업에 동참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승만(李承晩)과 국민회 총회장 최정익(崔正益)이었다.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공은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더불어 항카오(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의 땅 45만방(方)을 구입하여 한인 교포 10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한흥동(韓興洞) 이라고 명명하여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였다.

이어서 국내외의 의병들을 통합하여 보다 강력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1910년 6월에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화동하고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통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국내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의 편성을 아뢰고 군자금을 내려줄 것과 망명정부의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8월에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교포를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9월에 일본의 음모에 넘어간 러시아가 공의 일행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기 때문에 함께 쫓겨 갔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1년 한민장(韓民長)․김학만․이종호(李鍾浩)․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권업신문≫의 주간을 함께 맡기도 했다.

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정재관(鄭在寬)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의 장교를 양성하였다. 이듬해에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모두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수립하고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었다. 1915년 3월 중국 상해(上海) 영국조계(英國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에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한참 일할 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구국(救國)의 일생 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이회영(1867년~1932)은 서울 출신으로 호는우당, 좌찬성 유승(裕承)과 정경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 7남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년(李東寧)․신채호(申采浩)․안창호(安昌浩)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의 분야를 담당하고 만주에 광복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협의한 다음 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

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숙장(塾長)으로 선임하여 교육을 시행토록 하였으나 1907년에 이상설이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었으므로 여준(呂準)을 파견하여 교무행정을 맡도록 조치했다. 이듬해에 보재(漙齋. 상설의 호)가 열강을 역방하면서 주권회복의 활동을 하고 돌아오자 공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숙의하였는데 장차의 구국활동은 분담하기로 합의하고 국내활동은 공이 맡고 국외활동은 보재가 담당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공은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교육의 진흥이라 고 단언하고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민족의식교육에 힘쓰도록 독려하고 공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하여 민족의 각성을 축구하는 정신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하고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전가족이 만주로 솔가 망명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에 독립군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신흥무과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이었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온 민족이 고무되었고 공도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리에 회동하고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侍從) 이교영(李喬永)을 통하여 고종에게 상주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었으나 얼마 후에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시니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1919년 2월에 북경의 공의 자택에서 공과 이시영․이동녕․조성환․이광(李光)과 함께 회동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다음 국내외에 이 소식을 알리기로 하였다. 3․1운동 직후 본국에서 민족대표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북경에 있던 이시영․이동녕․조성환․이광 등과 함께 상해로 내가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했으나 동지들끼리 의견차이로 싸우는 것을 보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를 조직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와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의 의장에 추대된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항일구국연맹은 3대 강령( 1) 일본군기관과 수송기관을 파괴할 것. 2) 일본의 요인 및 친일파를 숙청할 것. 3) 일본의 외교기관을 폭파할 것)을 발표하고 중국국민당을 찾아가서 자금과 무기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그해 11월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의 구축과 주만일본군사령관의 암살을 결행할 목적으로 대련(大連)으로 가는 기차에서 일본경찰에게 잡혀 잔혹한 고문 끝에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3)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은 저 유명한 구국의 명신 백사공(白沙公)의 10대손이다. 아시는 바와같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공은 임진왜란 때에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으면서 끝까지 이 땅에서 왜적(倭賊)을 몰아내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분으로서 임진, 정유의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한성(漢城)으로 환도(還都)한 뒤에 선조대왕께서

종사(宗社)가 한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참으로 모든 대신들이 한 몸이 되어 애쓴 공로에 의함이지마는, 반드시 그 공로의 순위를 따지기로 한다면 그 첫 번째의 공훈은 부득불 경(卿)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宗社還于舊都只是賴諸卿力爾諸卿誠同功一體然必欲論首功不得不歸之卿耳) 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분이다.

백사공의 가문은 그 유례가 없을 만큼 번창하여 10대손인 성재선생에 이르기까지 부통령 1인, 영상(領相) 6인, 그리고 3인의 문형(文衡)을 배출한 명문이다.

성재선생은 우찬성(右贊成) 유승(裕承)공과 동래정씨(東來鄭氏) 사이에서 7형제 중 5자로 태어났다. 초취(初娶) 부인은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따님이셨으나 일찍이 사별하셨고 재취 부인도 만주의 독립투쟁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7세에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출사(出仕)하여 2년 뒤인 19세에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23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다음 요직을 거쳐 26세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에 이르고 을미년(乙未年. 단기4228.서기1895)에 왕명으로 청일전쟁의 관전사(觀戰使) 가 되어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여순(旅順), 대련(大連) 등 전투현장을 시찰하였다.

38세에 엄친의 기세(棄世)로 거상(居喪) 중에 평안남도(平安南道)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그 다음해에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판사에 이르렀으며 종2품 태극팔괘장(太極八卦章)을 받았다.

을사조약(乙巳條約. 단기4238.서기1905)이 체결되자 나라의 위기를 직감한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었는데, 그 주요 멤버는 선생을 위시하여 이회영(선생의 4째형),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양기탁(梁起鐸) 등이었고 서울의 상동(尙洞) 공옥학교(攻玉學校)에서 만나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숙의(熟議)하였다.

헤이그 밀사로 이상설(李相卨)공을 파견할 것을 건의한 것도 이 모임이었고 일본의 노골적인 박해를 피하여 해외로 나가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하기로 결의한 것도 이 모임이었다. 드디어 이회영, 이동녕, 장우순(張祐淳) 등 세분이 경술년(庚戌年. 단기4243.서기1910) 봄에 남만주를 답사하고 독립운동의 활동무대로 안동(安東), 환인(桓仁), 유하(柳河), 통화(通化)를 지정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해 8월 29일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나라가 망하니 이분들의 예측이 적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가 넘어가게 되니 한 나라의 진신(縉紳. 고관)이라는 것들의 추태가 가관이었다. 어떤 부류는 금품에 매수되어 함구하거나 또는 작위(爵位)를 받고 매국(賣國)에 동조했으며 이른바 유림(儒林)의 논객(論客)이라는 부류들도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적에게 빌붙거나 은둔하는 등 조야가 모두 패배주의로 기울 때에 우당선생과 성재선생의 6형제(7형제 가운데 6남 소영(韶榮)은 요절하였음)의 가족 50여명(노비까지 포함됨)은 분연히 솔가(率家)하여 만주로 망명한 다음 구국투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던 해 12월에 전 가족 50여명을 6~7조로 나누어 용산, 남대문, 장단(長湍) 등의 기차역에서 차례로 차를 태우고 만주로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일본경찰의 검색이 심하므로 한밤중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를 타고 건너 안동에서 며칠 쉬고 다시 환인을 거쳐 유하에 도착하여 비로소 짐을 풀었다.

누구 하나 반기는 이 없는 타국, 살을 에이는 만주벌판에 정착한지 2년 만에 어렵사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를 설립하였는데, 이해에 선생의 둘째형 석영(石榮. 고종 때의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에게 입양됨)공이 1만여 석의 가재(家財)를 방매하여 가지고 오니 그 자금으로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넓은 대지를 새로 매입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무관학교를 세웠으며 주변의 3~4 곳에 분교(分校)를 설치하여 10여년 동안이나 인재양성을 하게 되니 만주 일대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3,0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의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이 선생을 일러무관(無冠)의 제왕(帝王) 이라고 추겨 세운 뒤에 만주 일대의 살인 강도의 두령 이라고 대서특필하기에 이른 것이다.

홍범도(洪範圖)의 지휘 아래 왜군 100여명을 사살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의 통솔로 수1,000명의 왜군을 섬멸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에 의한 대첩(大捷)이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기미년(己未年. 단기4252.서기1919) 1월에 고종황제가 독시(毒弑)되었다는 소식에 전 민족이 통곡하고 있는데, 마침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를 주창하였다는 외신(外信)을 접한 선생은이 기회에 국내외의 동포들이 독립, 자존 을 외치며 떨쳐 일어나도록 해야겠다 고 생각하고 북경(北京)에 있는 중형(이회영)의 집에서 이회영, 이동녕,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등과 함께 3․1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국내외에 알렸으며 얼마 뒤에 본국에서 민족대표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 현순(玄楯)을 이끌고 북경의 이회영, 이동녕, 조성환, 이광 등과 함께 상해로 내려가서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창설하고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의정원장에 추대되었다.

이때의 임시정부 조직과정에서 지출된 모든 경비가, 고종황제께서 시해되기 전에 비밀리에 이회영선생에게 하사하신 5만원 중에서 지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무인년(戊寅年. 단기4271.서기1938)에 장개석정권(蔣介石政權)이 중경(重慶)으로 옮기자 임시정부도 함께 이사하게 되어 선생은 이때부터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번갈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명맥유지에 진력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 구국투쟁에 여념이 없던 계유년(癸酉年. 단기4266. 서기1933) 여름에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황염배의 ≪조선(朝鮮)≫이라는 신간(新刊)을 보고 거기에 쓰인,

조선족은 미개(未開)한 종족인데 일본이 지배하게 되면서 일본의 교화(敎化)에 의하여 비로소 문명한 민족이 되었다

는 내용을 읽고 어찌 비분강개하지 않으셨겠는가.

이런 연유로 선생은 항일투쟁의 와중인데도 1년 가까이 항주의 여관에서 한민족(韓民族)을 모독한 황염배의 글을 통박(痛駁)하고 더불어 세계를 향하여 <한민족의 위대성>을 펼쳐 보임으로써 한민족의 긍지(矜持)를 제고시키고자 피맺힌 글 ≪駁黃炎培之韓史觀≫이라는 저서를 집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을유년(乙酉年. 단기4278.서기1945)에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함으로써 한민족은 36년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으나 그것이 남의 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뜻하지 않았던 불행한 사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든다면, 우선 국토의 분단이 그 첫 번째이고 이로 인하여 야기된 민족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골육상쟁의 참상을 지적할 수가 있으며 그 두 번째의 커다란 비극이 점령군인 미군사령부에서 ≪임시정부≫라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통고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기쁨보다는 조국으로부터 날아오는 실망스런 소식에 탈진이 된 채 귀국 길에 올랐는데, 마침 장개석총통 부부가 비행기를 주선해주고 몸소 나와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환송하는 가운데 선생도 이해 겨울에 중경을 떠나 상해에 닿았고 여기서부터는 미군이 제공한 비행기로 환국했으나 점령군의 요구대로 임시정부는 해체되고 정부요인들은 개인의 자격 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해방된 고국에 돌아와서 성균관총재에 추대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지도층이라는 자들이 사분오열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보고 단기4280년(서기1947) 9월에 대종교(大倧敎)의 대표직만 빼놓고 일체의 공직에서 탈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선생이 80세가 되던 1월에 5.10 총선 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고, 3월에 군정장관 하지의 방문을 받고 한국이 처한 현실과 장래에 대하여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으며, 7월 3일에는 국회 본회의에 나아가서 198명의 민의원에게국호(國號)를《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해야한다 고 강조하고 그 필연성을 역사적 사실을 들어 역설하였다.

7월 12일 대한민국 헌법이 통과되고 16일 정부조직법이 가결되면서 20일에는 대망의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선생이 당선되었는바 득표수는 132표였다. 선생은 부통령에 당선된 뒤에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대통령선서식은 이미 취임식장에서 경과하였으나 국조단군(國祖檀君)께 드리는 경봉(敬奉)의 절차가 없을 수는 없지 않소

라고 하여 단군성전(檀君聖典)에 고유(告由)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일은 비록 조그마한 사건 같이 보이지만 장차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바로 세울 때에 중요한 기맥(起脈)의 역할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면서 선생의 민족적 정통성에 대한 집념을 확인할 수 있는 단면으로 이해된다.

선생은 단기4284년(서기1951) 5월 9일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여 부통령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하고 국회에 사표를 제출함과 동시에 저 유명한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회에서는 2일 후에 만장일치로 사표를 반려했으나 13일에 다시 제출하므로 할 수 없이 수리하였다.

이로부터 1년 후에 선생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민주세력과 국민의 여망을 거부할 수 없어서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고 대국민성명을 발표한다. 단기4285년(서기1952) 7월 27일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선생은,

이제 내가 목적으로 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하나입니다. 그것은 특권정치를 부인하고 민주정치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여 독재, 부패정권 타도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의지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으므로 언론도 <이 이상 4년 더 기다릴 수 없다>는 선생의 선거슬로건을 대서특필하여 독재와 부패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한 가닥의 꿈을 안겨주었으나 이승만 일파의 공작에 의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선생은 85세 되시던 단기4286년(서기1953) 4월 15일 새벽 2시경에 동래(東萊) 온천의 우사(寓舍)에서 영면하셨다. 장례는 전 국민의 애도 속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명예위원장에 부통령 함태영(咸台永), 위원장에 민의원의장 신익희(申翼熙), 부위원장에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국무총리서리 백두진(白斗鎭) 등 국무위원 전원과 각계의 유지가 모두 참예하였다.

 

선생은 일생을 화랑의 세속5계(世俗五戒) 를 애송(愛誦)했으며 항상말씀하시기를,

공직에 종사하는 자는, 공로는 남에게 돌리고(功歸于人), 허물은 내가 받는다(歸咎于身)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고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초취부인을 잃고 만주로 망명 후에 얼마 있지 않아서 또 상처를 당한 42세 이후에는 다시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지구 위에 망한 나라도 많고 애국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마는 6형제 50여명의 전 가족이 솔가하여 구국투쟁에 몸을 던진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1만여 석의 가산을 방매하여 무관학교를 짓고 독립군을 직접 길러냈으며 모진 고난 속에 시달리던 애국자들을 보살피면서 만주에서의 항일투쟁도, 중국에서의 임시정부도 모두 선생과 우당선생을 비롯한 6형제분들의 도움에 의하여 부지해나갔던 것이니 그 쓰라렸던 고난의 길, 36년의 피맺힌 세월을 누가 있어 선생과 우당선생 그리고 나머지 4형제분들과 그 가족 50여명의 혈성(血誠)에 견줄 수가 있을 것인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레주’ 전통의 표상이다.

 

마.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의 사업보국(事業報國)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38년 일제치하의 암흑기에 사업에 투신, 한국최고의 기업삼성을 창업하여 성장시킨 한국 기업인의 대명사이다. 또한 당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앞서가는 경영인으로서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해온 재계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호암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로 대변되는 철학을 가진 경영자로 가시적 업적에 못지 않게 신념과 경륜을 가진, 경영의 여러 분야에 걸쳐 원칙을 제시하고 또 일관된 실천을 보여 줌으로써 많은 교훈을 남겼다.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10년 2월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부친 이찬우 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생은 강직한 가풍 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병철 선생은 다섯 살 때부터 조부인 문산 이홍석 공이 세운 서당 문산정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고, 열한 살 되던 해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 편입, 이듬해에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옮겨 수학했다. 그 후 중동중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926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 박두울 여사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학업에 전념하던 이병철 선생은 1930년 4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 무렵 세계적인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심한 경제혼란이 빚어 낸 사회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이병철 선생은 느끼고 생각한 바가 많아 동경의 유학생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병철 선생은 몇 년 동안 깊은 사색과 구상 끝에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경제의 건설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1938년 3월1일 이병철 선생은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중국과 만주 등을 상대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삼성상회는 무역업 외에도 국수 제조업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성장가도를 달렸고 이병철 선생은 삼성상회의 성공에 힘입어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자본금 3만원으로 창립된 삼성상회, 이병철 선생은 이전의 사업경험을 살려 삼성상회를 단기간에 급성장시켰고, 삼성상회가 바로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주춧돌이 된 것이다.

기업경영의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던 이병철 선생은 개화기의 혼돈과 일제치하의 태평양전쟁, 한국동란 등 민족의 대수난을 겪으면서도 사업보국의 염원은 한결 같았다. 전란으로 폐허가 된 황량한 땅에 빈손으로 피난하여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대구에서 제일모직을 세워 그 시대에 이미 수입대체산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들은 최고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새로운 경영기법을 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기업이었다.

평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이병철 선생은 1961

년 한국의 대표적인 경영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한국경제인협회를 발의했고 초대회장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직을 맡았다.

이때 비로소 우리나라는 경제부흥의 기운을 찾게 되었고 중요한 경제정책들이 수립되는가 하면 모든 경제인들의 창의력과 추진력이 발휘되어 5천년 민족사의 숙원인 빈곤추방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농업의 자급자족을 통한 민생안정의 방안을 구상했던 이병철 선생은 1967년세계최대의 단일비료생산시설인 한국비료공장을 세워 오랜 숙원을 이루었다.

또한 중앙 매스컴을 설립해 신문, 방송, 출판을 통해 한국언론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언론문화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동양최대의 사립 호암미술관을 세워 후세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는 한편, 삼성미술문화재단을 통한 도의문화진작과 예술문화 창달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병철 선생의 탁월한 경영능력과 미래를 통찰하는 선견력, 강인한 지도력은 우리 시대 최첨단의 개척분야인 유전공학과 우주항공산업에서도 빛을 내기 시작해 후세들에게 미래의 꿈과 무한번영의 교훈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위업들을 남기고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87년 11월19일 오후5시 향년78세로 영면하였다. 이병철 선생의 공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일본 정부는 훈일등서보훈장을 추서하였다.

호암 이병철 선생의 열정과 혼이 담긴 삼성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三男인 이건희(李健熙)회장이 경영을 맡아 새로운 사업과 경영방식을 개척하여 우리나라 총수출의 20%, 시가총액의 27%를 차지하는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발전시켰다. 나아가 이건희 회장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일등 제품을 개발하여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을 뿐만 아니라 사회공헌사업에도 힘을 쏟아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