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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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8-02-01 10:29

분성배씨시조 및 분성배씨유래(본관)

분성(奔星)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동부 낙동강(洛東江)의 서안에 위치한 김해(金海)의 고려(高麗) 때 지명(地名)으로 본래 가락국(駕洛國)이었는데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법흥왕(法興王) 때 금관국(金官國)이 되었다가 문무왕(文武王)이 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김해(金海)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가 부(府)로 강등시켜 뒤에 임해현(臨海縣)이 되었으나 성종(成宗) 때 금주(金州)로 개칭되고 원종조(元宗朝)에 와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김해로 고쳐 부(府)로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太宗)이 이 곳에다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기도 했으며 고종(高宗) 때 군(郡)으로 승격, 1906년 양산군의 2개면을 병합하고, 1981년 시(市)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분성배씨(盆城裵氏)는 고려 창업의 일등원훈(一等元勳) 배현경(裵玄慶 : 중시조)의 6손인 원룡(元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분성배씨대동보(盆城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사혁(斯革)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도원수(都元帥)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고 분성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인맥(人脈)으로는 원룡(元龍)의 아들 중 장남 서(署)가 고려조에서 감무어사(監務御史)와 전객령(典客令)을 지냈으녀, 손자 단(端)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생원(生員) 윤온(允溫)의 아들 극수(克壽)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양성에 진력하며 거문고와 독서(讀書)로 여생을 보냈으며, 윤검(允儉)의 아들 극부(克富)는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며 학문으로 명성을 떨쳐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의 가통을 세웠다.

교수(敎授) 상금(尙錦)의 장남인 문보(文甫)는 중종(中宗) 때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쳐 그가 죽자 왕이 제문(祭文)을 내려 공적(功績)을 치하했으며, 직장(直長) 유흥(有興)의 아들 진(縉)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탁월(卓越)하여 아들 맹후(孟厚)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1462년(세조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맹후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성종(成宗) 때 사신(使臣)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왔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기풍(氣風)을 바로잡아 왕으로부터 포상이 내려졌다. 그의 아우 중후(仲厚)는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으며, 숙후(叔厚)는 연산군(燕山君)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고, 계후(季厚)는 경주 판관(慶州判官)과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온후(溫厚)한 성품과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었던 학(鶴 : 용양위 부호군 세즙의 아들)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노천(老泉) 김 식(金 湜)에게 글을 배웠으며 도천(道泉)에다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면서 스스로 호(號)를 임천(林泉)이라 하였다.

문벌(文伐)의 가문에 무맥(武脈)을 형성한 철중(鐵重)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거쳐 홍주 영장(洪州營將)을 지내고 손가락을 잘라 모친(母親)의 병환에 수혈하여 사림(士林)의 주청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를 지낸 담(湛)은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쳐 학행(學行)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던 영(渶)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陜)에서 회맹(會盟)했던 원우(元佑)는 전쟁에 나가 무훈(武勳)을 세워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석학(碩學) 조 식(曹 植)의 고제(高弟)인 명원(明遠)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성(城)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된 아우 형원(亨遠)과 더불어 의절(義節)의 가맥(家脈)을 지켰다.

광해군(光海君)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다가 인조반덩(仁祖反正) 후에 삭직당했던 대유(大維)는 문장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고,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와 오위진결(五衛陳結)을 공부했던 응남(應男)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숙부(叔父) 원우(元祐)와 함께 하양사(河陽祠)에 배향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사오당(四吾堂) 양옥(良玉)이 문장과 행의(行誼)로 추앙을 받았으며, 홍우(弘祐)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장현광(張顯光)의 휘하에서 희병(義兵)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여, 죽림(竹林)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진 양성에 진력했던 동도(東度), 숙종(肅宗) 때 효행(孝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던 여경(汝慶),「심경보사(心經補辭)」의 저자인 일장(一長), 항일투사 동석(東奭) 등과 함께 분성 배씨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분성배씨(盆城裵氏)는 남한에 총 48,4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분성배씨조상인물

배서(裵 署) 고려조에 감무어사(監務御使)․전객령(典客令)을 역임하였다.

배종주(裵宗柱) 고려 때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였다.

배 단(裵 端)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배공보(裵公輔) 고려 때 판도사사(版圖司事)․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배정비(裵廷斐) 호(號)는 귀연(龜淵). 고려 때 진사(進士)였다.

배정미(裵廷亹) 고려 때 진사(進士)였다.

배정현(裵廷顯) 고려조(高麗朝)에 진사(進士)였다.

배 수(裵 守) 고려(高麗) 때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냈다. 1346년(충목왕 2) 이곡(李穀)이 지은 연복사(演福寺) 종명(鐘銘)에 상호군(上將軍) 배천경(裵天慶), 흥해군(興海君) 배 전(裵 全)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배 찬(裵 襸) 1446년(세종 28) 무창 군수(茂昌郡守)에 기용(起用)되어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방어(防禦)하였다.

배 우(裵 礻憂)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배윤손(裵允遜) 조선에서 부윤(府尹)을 지냈다.

배윤상(裵允祥)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배상휘(裵尙輝) 조선(朝鮮)에서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배유흥(裵有興)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배유선(裵有宣) 조선조(朝鮮朝)에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역임하였다.

배극수(裵克壽) 호(號)는 송헌(松軒). 천성(天性)이 영민(英敏)하고 독신성학(篤信性學)하였다. 그후 제주 점마차사(濟州點馬差使)에 등용(登用)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영남(嶺南)에서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이거하여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며 거문고와 독서(讀書)로 여생을 보냈다.

배진손(裵晋孫) 호(號)는 애음(厓陰). 조선 때의 학자(學者)로 학문(學問)이 조숙(早熟)하여 영산(靈山)에서 청도(淸道) 운문(雲門)으로 이거(移居)하여 도학(道學)을 연구하였다.

배광우(裵光祐) 자(字)는 이열(而烈). 조선 세조(世祖) 때 벼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으나 49세에 죽었다.

배극부(裵克富) 자(字)는 사관(士寬), 호(號)는 둔촌(遯村). 조선 때 문장(文章)이 뛰어난 학자(學者)로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였으며, 충주(忠州) 불정촌(佛丁村)에 이거(移居)하여 둔적(遯跡), 의(義)를 숭상(崇尙)하였다 하여 호(號)를 둔촌(遯村)이라 하였다.

배 하(裵 夏) 자(字)는 순거(舜擧), 호(號)는 노은(老隱). 일찍이 벼슬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영동정(令同正)에 이르렀으나 사임하고 산음 봉곡(山陰鳳谷)에 은거(隱居)하여 다시는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 이름을 노은(老隱)이라 하였다.

배문보(裵文甫) 자(字)는 천장(天章), 호(號)는 세한재(歲寒齋). 1526년(중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였고, 1545년(인종 1)에 죽으니 왕(王)이 제문을 내리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장례(葬禮)를 치르도록 하였다.

배 특(裵 忒)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배광한(裵匡漢) 조선(朝鮮) 때 훈도(訓導)를 지냈다.

배 진(裵 縉) 조선(朝鮮) 때 음보(蔭補)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되었다. 문장필법(文章筆法)이 탁월(卓越)하였고, 유구생필(遺句生筆)이 전(傳)해온다.

배득호(裵得浩)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배양덕(裵陽德) 조선(朝鮮)에서 동정(同正)을 지냈다.

배맹후(裵孟厚) 자(字)는 재지(載之), 호(號)는 계당(桂堂). 1462년(세조 7) 생원(生員)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그후 예문관 수찬관(藝文館修撰官)․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5년(성종 6) 사신(使臣)의 기풍(氣風)을 바로잡고 왕(王)으로부터 포상(褒賞)을 받았다.

배중후(裵仲厚) 조선조에 일찍이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에 합격했으나 과거(過擧)를 단념하고 학문(學問)을 연마(硏磨), 문장 도학(文章道學)이 뛰어나 당시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이심원(李深源)․조 려(趙 旅)․조 욱(趙 昱) 등과 도의 상교(道義相交)하며 시문(詩文)을 창화(唱和)했다. 내내강사(奈內江舍)의 사운삼수(四韻三首)와 산인혜영(山人慧穎)의 증시(贈詩) 1수(首)는 특히 유명(有名)하다.

배숙후(裵叔厚) 호(號)는 백암(白菴).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 경리학(經理學)에 능(能)하였고, 종정(從政)에 뜻이 있어 문과(文科)에 급제, 1489년(성종 20)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1494년(성종 25)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495년(연산군 1) 승예랑(承禮郞) 오수찰방(鰲樹察訪)을 지냈다.

배계후(裵季厚) 자(字)는 직방(直方), 호(號)는 모당(慕堂). 1474년(성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478년(성종 9) 경주 판관(慶州判官)이 되고, 1488년(성종 19)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1491년(성종 22)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배이동(裵二仝) 조선(朝鮮) 때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냈다.

배세강(裵世綱) 호(號)는 영락(永樂). 조선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 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복지축실(卜地築室)하니 그 동명(洞名)을 성당(盛塘)이라 하였고, 점산작사(占山作舍)하니 그 정자(亭子)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배세적(裵世績) 자(字)는 무숙(懋叔), 호(號)는 정곡(靜谷).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문장 행의(文章行誼)가 중후(重厚)하였고, 1498년(연산군 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봉직랑(奉直郞)으로서 군위(軍威)에 출재(出宰)하였는데 정사(政事)가 청백(淸白)하고 경내(境內)가 화흡(和翕)하였다.

재임중(在任中)에 죽으니 군민(郡民)의 애통함이 부모상(父母喪)을 당함과 같았다. 칠원(漆原)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가 현재는 칠원(漆原)의 모현사(慕賢祠)에 복향(復享)되었다.

배 윤(裵 倫) 자(字)는 무랑(務郞). 조선 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겸 어사(御史)를 지내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배세현(裵世賢) 자(字)는 성측(聖則). 조선에서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지냈다.

배 순(裵 純) 자(字)는 세경(世經), 호(號)는 두암(杜菴).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지냈다.

배 학(裵 鶴) 자(字)는 태충(太冲), 호(號)는 임천(林泉). 성품이 온후(溫厚)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기용(起用)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노천(老泉) 김식(金湜)을 사사(師事)하였으며, 도천(道泉)에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專心)하면서 스스로 호(號)를 임천(林泉)이라 하였다. 영산(靈山)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성달(裵成達) 자(字)는 선문(善文). 조선(朝鮮) 때 삼척 부사(三陟府使)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이민(吏民)이 칭송(稱頌)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배신침(裵愼忱) 자(字)는 정숙(靜叔), 호(號)는 임당(林塘).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행의(行誼)가 성실하여 세인(世人)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노진(盧禛)․오건( 健)등과 더불어 도의(道義)와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하며 연마(硏磨)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사림(士林)의 추천(推薦)으로 산청(山淸)의 평천서원(平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윤침(裵允忱) 자(字)는 윤숙(允淑), 호(號)는 지산(芝山).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역임하였다.

배철중(裵鐵重)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기사(騎射)에 능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578년(선조 11) 아산 현감(牙山縣監)․홍주 영장(洪州營將)에 기용(起用)되었다. 이듬해 모친(母親)의 병환(病患)이 위급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수혈(輸血)하여 소생(蘇生)케 하였다. 인조(仁祖) 때 사림(士林)들의 주청(奏請)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배 담(裵 湛) 자(字)는 화여(和汝), 호(號)는 야은(野隱).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덕 현령(盈德縣令)․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에 기용(起用)되어 3년간 재직(在職)하면서 청백리(淸白吏)로 유명(有名)하였고, 사퇴한 후 군자동(君子洞)에 은거(隱居)하면서 후진 양성(後進養城)에 힘썼다. 군자동(君子洞)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배 영(裵 渶) 자(字)는 심원(深源), 호(號)는 인재(忍齋). 성품(性稟)이 순수(純粹)하여 당세(當世)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자손(子孫)을 교훈(敎訓)함에 반드시 충효(忠孝)로써 가르치고, 시(詩)를 지어 자제(子弟)를 가르치며 만년(晩年)을 전원(田園)에서 마쳤다. 학행(學行)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상겸(裵尙謙) 자(字)는 수익(受益), 호(號)는 호은(湖隱). 조선 때 문장필법(文章筆法)이 뛰어난 학자(學者)로 당세(當世)에 유명하였다.

배원우(裵元佑) 자(字)는 자동(自東), 호(號)는 두곡(杜谷).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陜)에서 회맹(會盟)하고, 적(敵)과 접전(接戰) 끝에 소탕(掃蕩)하고 향민(鄕民)을 보호(保護)하였다.

선무(宣武) 이등(二等)에 녹훈되고,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다. 경북 하양군(慶北河陽郡) 하양사(河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세겸(裵世謙) 자(字)는 공익(公益), 호(號)는 심원재(心遠齋).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우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任命)되었다. 평천사(平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명원(裵明遠) 자(字)는 군회(君晦), 호(號)는 월정(月汀). 천성(天性)이 강직(剛直)하고 의리(義理)가 깊어 조 식(曺 植) 문하(門下)에서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사우(士友)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벼슬이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진관 병마절제사(鎭管兵馬節制使)가 되어 성(城)을 지키다가 군중(軍中)에서 순사(殉死)하였다.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대유(裵大維) 1563 (명종 18) ~ ?

자(字)는 자장(子張), 호(號)는 모정(慕亭), 부정(副正) 영(瑛)의 아들. 1590년(선조 2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化旺山城)을 수비했다.

1608년(선조 4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2년(광해군 4) 지평(持平), 이어 정언(正言)․장령(掌令)․보덕(輔德)․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1621년(광해군 13)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올랐다.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에 참여했으므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삭직(削職)당했다. 문장에 능했고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다.

배형원(裵亨遠) 자(字)는 군길(君吉), 호(號)는 정곡(汀谷). 효행(孝行)이 지극하고 학문(學問)에 뜻이 있어 전원(田園)에 은거(隱居)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형(兄) 명원(明遠)과 함께 종군(從軍), 전공(戰功)을 세우고 원종공신(原從功臣) 이등(二等)에 책록되었다. 난(亂)이 끝난 후에 공명(功名)을 자랑하지 않고 임천(林泉)에 은거(隱居)하였다. 유일(遺逸)로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김해교수(金海敎授)를 지냈고,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員)에 제향(祭享)되었다.

배경남(裵慶南) 자(字)는 문길(門吉). 1572년(선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단주 부사(端州府使)를 역임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류성룡(柳成龍)․이정귀(李廷龜) 등과 사귀었다.

배응남(裵應男) 초명(初名)은 응남(應男), 자(字)는 인수(仁叟), 호(號)는 운계(雲溪). 어려서부터 영특(英特)하고 성장함에 외모(外貌)가 준수하고 성격이 쾌활하여 대장부(大丈夫)의 풍도(風度)가 있으므로 그의 숙부(叔父) 원우(元佑)가 그 기량(器量)을 중시하고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倫理)와 오위진결(五衛陳結)의 방법(方法)을 공부하게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峽)에서 회맹(會盟)하고 적(敵)과 접전(接戰) 끝에 이를 소탕(掃蕩)하고 향민(鄕民)을 보호하였다. 선무(宣武) 이등(二等)에 녹훈되고 숙부(叔父) 원우(元佑)와 함께 하양사(河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양옥(裵良玉) 자(字)는 기지(器之), 호(號)는 사오당(四吾堂). 학문(學問)이 조숙(早熟)하여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추앙(推仰) 받았으나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탐구(探究)에 뜻을 두어 장암(藏巖)에 은입(隱入)하여 잠적(潛跡)하고 정자(亭子)를 선바위 뒤 층대(層臺)에 세우고 도의강마(道義講磨)에 전심(專心)하였다. 황협(黃峽)․맹헌(孟獻)․강헌지(姜獻之) 등과 시장(詩章)을 창화(唱和)하고 학문(學問)을 상교(相交)하였다.

배홍우(裵弘祐) 자(字)는 수보(綏甫), 호(號)는 양지재(養志齋). 1616년(광해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감찰(監察)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625년(인조 3)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비문(碑文)을 썼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휘하에 의병(義兵)을 모집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배 경(裵 絅) 자(字)는 문보(文甫), 호(號)는 제헌(齊軒). 조선조(朝鮮朝)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배득신(裵得信) 자(字)는 가정(佳亭), 호(號)는 정와(靜窩). 조선(朝鮮)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배동도(裵東度) 자(字)는 여헌(汝憲), 호(號)는 일암(逸庵). 조선 때 재질(才質)이 뛰어나서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였고, 죽림(竹林) 가운데 정사(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위하여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했다. 그는 또한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버이 상(喪)을 당(當)했을 때 여막(廬幕)에서 3년 거상(居喪)을 마쳤다.

인조(仁祖) 때 학행(學行)으로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辭讓)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역임하였다.

배명윤(裵命胤) 자(字)는 덕승(德承), 호(號)는 삼외당(三畏堂).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새벽에 부모(父母)의 침소(寢所)에 문안(問安)하고 재사(齋舍)에서 글을 읽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해서는 여막(廬幕)에서 집상(執喪)하니 향리 사림(鄕里士林)의 주청(奏請)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여경(裵汝慶) 자(字)는 선여(善餘), 호(號)는 일성재(一誠齋). 효우(孝友)가 출중(出衆)하여 형제(兄弟)가 한방에서 연상공금(聯床共衾)했다. 부모상(父母喪)을 거듭 당하니 계속해서 6년을 여막(廬幕)에서 거상(居喪)했고,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세우니 사림(士林)들이 일성재(一誠齋)라 했다.

1695년(숙종 21) 효행(孝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任命) 되었으나 부임전에 죽었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배일장(裵一長) 자(字)는 자첨(子襜), 호(號)는 계헌(戒軒). 조선 때 산곡여막(山谷廬幕)에서 학구(學究) 끝에 「심경보사(心經補辭)」를 저술(著述)하였다.

1675년(숙종 1) 남구만(南九萬)의 천거(薦擧)로 강릉 참봉(康陵參奉)이 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전심했다.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진명(裵震明) 자(字)는 덕휘(德輝), 호(號)는 모헌(慕軒). 박학(博學)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하여 여막(廬幕)에서 거상(居喪)했고 부모(父母)를 종신(終身) 사모(思慕)하는 뜻에서 호(號)를 모헌(慕軒)이라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 황협(黃 峽)․맹헌(孟獻)과 호선락도(好善樂道)했다.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덕성(裵悳星) 자(字)는 종일(宗一), 호(號)는 송은(松隱).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배왈대(裵曰大) 자(字)는 군보(君甫), 호(號)는 운곡(雲谷). 조선(朝鮮) 때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에 이르렀다.

배필문(裵弼文) 자(字)는 성뢰(聖賚), 호(號)는 각봉(覺峰).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배식근(裵植根)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 찬(裵 瓚) 자는 우서(禹瑞), 호는 금계(錦溪). 조선 때 사마(司馬)를 지냈다.

배동석(裵東奭) 1891 (고종 28) ~ 1921

성두(聖斗)의 아들. 경남 김해(金海) 출신. 1906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중, 배일사상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하고 출옥 후 동교(同校)를 중퇴,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했다.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일운동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와 국외로 탈출하여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 등과 활동했다. 1918년 귀국, 경성연합의전(京城聯合醫專: 세브란스)에 입학, 1919년 2월 김원벽(金元壁)․이갑성(李甲成)․한위건(韓偉健)등과 음악회를 가장하고 3․1운동의 전개를 의논, 3월 1일 학생 대표로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을 하다가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배덕수(裵德秀) 한말(韓末)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