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하남정씨(河南程氏),정사조(程思祖),하남정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3-04 14:03 수정일 : 2019-09-04 15:50

   

 

하남정씨(河南程氏)의 연원

◇ 득성개종(得姓開宗) 연혁

△득성개종조 교백 백부(得姓開宗祖 喬伯 伯符 BC1150)

:정씨(程氏)의 연원은 중국의 황제(黃帝)이다. 교백 백부는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후손인 중여(重黎)의 후예로써 BC2700년경부터 하상주(夏商周) 시대에 걸쳐 세거필영(世居畢郢) 여러 대를 이어 살던 땅에서 주나라 성왕(成王)으로부터 광평정국백(廣平程國伯)에 책봉되니 나라 이름을 따라 성씨를 삼아 득성개종조가 되었다. 교백의 배필은 주문왕의 따님이다.(성왕은 문왕의 손자)

득성개종조 교백의 5世 휴부(休父)가 BC782년 주선왕 때 대사마(大司馬)로 책봉되니 장자 경신은 사마씨(司馬氏)의 시조로 개성(改姓)하고 차자(次子) 중신(仲辛)이 정씨세계(程氏世系)를 계승하였다.

 

◇ 하남정씨(河南程氏) 연혁

△태자소사공 우(太子少師公 羽 907-981)

:득성개종조인 교백의 75世로 오대하북지란(五代河北之亂)에서 벗어나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 옮겨 살게 되어 개봉부판관을 역임하였으며 증예부상서와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추증되었다.

△이정부자(二程夫子):명도부자 호(明道夫子 顥)

                            :이천부자 이(伊川夫子 頤)

:태자소사공의 현손(玄孫)이며 형제분으로 형이상학적 천리론(天理論)과 인간본성 안에서 이성적 근거를 찾는 북송성리학(北宋性理學)의 태두로써 공맹(孔孟)의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신유학 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역전(易傳)을 저술하고 이정전서(二程全書)를 남겼다.

이천(伊川) 사후(死後) 82년(1189)에 주부자 희(朱夫子 熹)가 대학장구 서문에서 “천운순환(天運循環)하사...(중략), 하남정씨 양부자(兩夫子)가 출(出)하사...(중략),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과 성인의 경문이 세상에 밝혀지기 시작했다.”라고 썼기에 하남정씨의 본관(本貫)이 대학을 배우는 모든 선비들에게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 하남정씨 정종세계(河南程氏 正宗世系)

△이천부자 낙국공 이(伊川夫子 洛國公 頤 1033-1107)

:하남정씨 정종세계는 이천부자(伊川夫子)로부터 기세(起世)하여 후손의 친소(親疎)를 밝히고 있다.

 

◇ 하남정씨 한국계보(河南程氏 韓國系譜)

△시조 문헌공 사조(始祖 文獻公 思祖 1309-1383)

:득성개종조인 교백의 88世요 하남정씨 이천부자(伊川夫子)의 10世이다. 원나라 이부상서 정덕용의 자(子) 광조(光祖) 사조(思祖) 소조(紹祖) 경조(敬祖) 중 차자(次子)로써 원나라 위위시승으로 1351년 12월에 원순제의 명을 받아 고려 공민왕비인 노국공주와 같이 고려에 입국한 후 하남정씨 정종세계를 계승하여 한국 정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고려조 위위시경에 초배되어 어사대부를 역임하면서 성리학과 역전을 강론하니 크고 높은 공덕으로 추성보리공신 삼한삼중대광에 추증되었다.

하남정씨 한국계보의 역사는 시조 문헌공이 이 땅에 동도(東渡) 한지 650여 년에 이르고 있으며 서기2000년 정부 통계자료에 의한 남한의 하남정씨 인구는 32,519명으로 280여 성씨 중 75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산정씨 계보

동래시조(東來始祖) 고려 정사조공(程思祖公)은 1309년 원무종(元武宗) 8년에 출생하여 원순제조(元順帝朝)에 벼슬이 위위시승(衛尉寺丞)으로 1351년 12월에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고 공민왕의 즉위안치(卽位安置)와 민본왕도 정치 구현의 공이 지대함으로 추성보리공신에 녹(祿)하고 추증하여 고려 위위시경(衛尉寺卿)에 초배되었다.

1357년 정유에 어사대부의 수임을 받아 후진의 고려 조정을 경학(經學)과 정자학(程子學)의 강론으로 널리 깨우쳐 위대한 외훈(巍勳)을 크게 수립하니 공민왕이 친예우로 1362년 임인에 삼중대광한산부원군(三重大匡韓山府院君)으로 훈봉하여 충청도 한산에 식읍(食邑) 영지(領地)를 하사(下賜)하니 관지명(官地名)에 따라 우리나라 한산정씨의 시조(始祖)이시다.


하남정씨조상인물

선계선대(先系先代) 인물

開宗23世 邈:진시황제에게 예서(隸書) 3000자(字)를 만들어 올리니 그 공(功)이 실로 태양과 같다고 하였다.

開宗78世 珦(1006-1099):이정부자(二程夫子)의 부친으로 영년현개국백(永年縣開國伯)에 봉작(封爵)되고 태중대부(太中大夫) 서경국자감을 역임하였으며 1330년 원문정황제로부터 개국공(開國公)으로 추봉(追封)되었다.

河南1世 顥(1032-1085) :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 향년54世로 시호는 순공(純公). 하남백(河南伯) 예국공(豫國公)에 추봉(追封)되었으며,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되고 문묘종향위(文廟從享位)에 봉사(奉祀)되다.

河南1世 頤(1033-1107) :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 수75世로 시호는 정공(正公). 이양백(伊陽伯) 낙국공(洛國公)에 추봉(追封)되었으며,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되고 문묘종향위(文廟從享位)에 봉사(奉祀)되다.

 

고려시대(高麗時代) 인물
정광(程廣) : 두문동72현(杜門洞72賢 1334-1407)
  자는 덕노(德魯). 호는 건천(巾川). 고려 동래시조(東來始祖) 정사조(程思祖)의 차자(次子). 전중성판사(殿中省判事)로 창왕(昌王) 패위시 관직을 버리고 고려가 망하자 형 정도(程度)와 조카들, 아들 유연, 유달, 유통 등 온가족이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다가 방화로 전라 광주 금당산 아래 정가막동(程家幕洞)에 은둔했으며 건천집을 남겼다. 한국 정씨는 모두 건천공 정광의 후손이다.
  호남절의록과 여조충절록, 충의록, 건천집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유고시 26수와 일기, 산록 등이 있다. 산록에서 “장차 후세에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하고자 산록과 일기를 쓰노라”고 하였으며 하남정씨 후손들은 이 유지를 받들어 임진왜란 이전에 관직에 나간 자 거의 없었다.
  건천집에 수록된 시문에 그 기개와 절의가 담겨 있다.

◇ 歲壬戌七月旣望夜同諸公遊滿月臺各次一句以暢敍幽情
  세임술칠월기망야동제공유만월대각차일구이창서유정
  ---1382년 임술 7월 16일 밤 제공들과 만월대에서 한 구절씩 읊은 깊은 뜻의 서정시
臺夜秋風漸覺寒 만월대 밤의 찬바람을 점점 깨닫네
대야추풍점각한 ---예의판서 민안부(閔安富)
坐來一片月長安 이곳에 와 앉으니 장안 달이 한조각일세
좌래일편월장안 ---직제학 안성(安省)
雪消萬里天心廓 온 세상 눈은 녹았는데 천심은 열려있네
설소만리천심곽 ---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
炯擁千家洞口寬 모두 밝게사는 마을식구들이 너그럽구나
형옹천가동구관 ---장령 서견(徐甄)
今夕壺樽觀野客 오늘 저무는 흥취를 야노는 바라보네
금석호준관야객 ---예부상서 김주(金澍)
明朝銦佩晉廷官 이조에 칼찬자는 옛 조정의 관원일세
명조인패진정관 ---추밀원학사 이종학(李鍾學)

錦筵罷酒佳人起 금연 파주하고 가인이 일어나니
금연파주가인기 ---문하부사 남을진(南乙珍)
勝事他時再得難 전조사 언제 다시 얻기 어려워라
승사타시재득난 ---전중성판사 정광(程廣)

 

◇ 書古詩送尨村黃喜(서고시송방촌황희)---옛 시를 써서 황희에게 보낸 시
君登靑雲去 그대는 청운을 타고 가오
군등청운거
余望靑山歸 나는 청산을 바라보고 가겠소
여망청산귀
雲山從此別 구름과 청산을 좇는 이 이별이여
운산종차별
漏濕碧蘿衣 눈물이 파란 도포자락을 적시네
누습벽라의

 

◇ 戒子詩(계자시)--- 아들을 경계하여 지은 시

汝亦麗朝臣 너 또한 고려조의 신하이거늘
여역여조신
何可事新君 어찌 새 임금을 섬기랴
하가사신군
若知人臣道 만약 신하된 도리를 안다면
약지인신도
不忘前王恩 전조 임금의 은혜를 잊지마라
불망전왕은

 

◇ 登瑞石吟(등서석음) --- 무등산 서석대에 올라 읊음
瑞石靑春也自好 서석산의 푸른 봄을 좋아하네
서석청춘야자호
雖將松岳舊顔來 송악에 있던 나를 누가 데려왔나
수장송악구안래
一回含漏一回哭 한 번 눈물을 머금어 또 한번 통곡하네
일회함루일회곡
水咽出溪鬱此懷 물을 토해내는 산골짜기에 우울한 회포를 삼키네
수인출계울차회     

           

조선시대(朝鮮時代) 인물
정득운(程得雲) : 임란공신(壬亂功臣). 자는 운서(雲瑞). 호는 우옹(羽翁). 중국 송나라 때 성현 정이천(程伊川)의 후손 건천공 정광(巾川公 程廣)의 9세손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아우 정득원(程得元)과 의병을 모아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과 낙안군수 방덕용과 중국 이천총 장수와 합세하여 벌교, 광양, 순천전에 참전, 많은 전공을 세우고 1599년 4월 2일 무과병과에 급제하여 전 전공을 참작, 부장으로 임명되고 진위장군 만호를 제수하였다. 1604년 세상을 떠나니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어 병마첨절제사 어회장군 통훈대부에 추증되고 1684년 도신감사의 상소로 병조판서 자헌대부에 추증되었다.
정득원(程得元) : 임란공신(壬亂功臣). 자는 원서(元瑞). 호는 우간(羽幹). 건천공 정광(巾川公 程廣)의 9세손으로 상기 정득운의 아우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 방덕용과 중국 이천총 장수와 합세, 벌교성 밖에 방수하는 적을 공격할 때 형 정득운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서로 조익진이 되어 좌우로 충격하여 왜적 일백 수십명을 사살하고 적 전선 오륙적을 불사르며 적의 예봉을 꺾어 패주토록 하였으나 불행히 이 때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 충의 교위가 되었으며 1648년 감사의 상소소 병조판서 자헌대부에 추증되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무원종공신록, 교지 등>
정득훈(程得勳) : 임란공신(壬亂功臣). 자는 석부(碩夫). 1592년 임진 5월 29일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키고 공은 담양에서 의병을 모아 막하 작전계획에 참여 7월 9일 진산에서 왜적과 일주야를 고군분투 결사항전 왜적 수천을 사살 참획하였으나 왜적의 대군 앞에 중과부적으로 고경명의 휘하 6천여 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하였다.<참고자료: 전라현창록, 담양향교록, 임란공신유사지>

정억강(程億綱) : 임란공신(壬亂功臣). 자는 중화(重和). 건천공 정광(巾川公 程廣)의 9세손이다. 1592년 충주 옥천에서 창의근왕병을 모취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이 중봉(重峰)과 동문수학한 바 있어 적극 참여하여 옷깃에 살신성인이란 네 글자를 써 죽음을 맹세하여 왜적을 토벌하였으며 조헌과 승군장(僧軍將) 영규군(靈圭軍)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여 적의 예봉을 꺾기도 하였으나 관륜의 방해로 2천의 병이 흩어져 7백 여명만이 금산에서 왜적과 결사항전 전 의병이 모두 잘렬히 순국산화하니 8월 18일이었다. 공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어 7백의총에 합장하였다. <참고자료: 8백의총 비문록명>
정유미(程惟美) : 중국 명나라의 부사로 본관은 하남(河南)이다. 정유재침(丁酉再侵)으로 국가존망위기에 처해 급고사 권협을 명나라에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정유미 부사가 전폭적으로 의견을 들어주어 정토계획을 마련, 황제에게 제본을 올려 20만 대군과 수군출동, 군기군량확보, 즉시출병 등의 황제 윤허를 받아내는데 결정적 역할의 공이 지대하였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정극신(程克愼) : 자는 정부(正夫). 호는 청허당(淸虛堂). 선조21년 성균진사(成均進士). 효성이 지극하다는 유림들의 천장(薦狀)에 선조대왕이 증예조참판(贈禮曹參判). 재 광산여지승람(載 光山與地勝覽)
정극화(程克和) : 자는 관부(寬夫). 호는 계양공(桂陽公). 조카 우옹공(羽翁公) 득운(得雲)이 의병을 일으켜 항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곡을 수렴, 자기 전 재산을 헌납 운송 국토수복에 충성을 다 바쳤음을 선조대왕이 감흡하여 공조참판에 증하였다.
정경수(程景洙) : 자는 계명(繼明). 호는 막천(幕川). 천재적인 영특함이 있어 13세에 시송에 능통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14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였다. 향리 유림들이 천장(薦狀)을 나라에 올려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내렸다. <참고자료: 전라도지>


◇ 삼강문 정려(三綱門 旌閭) : 전남 화순군 도곡면 신덕리 소재 삼강문은 임란공신 득운(得雲)과 득원(得元), 열녀인 득원의 배(配) 한산이씨(韓山李氏)와 덕인의 배(配) 진주강씨(晋州姜氏), 효자인 득원의 자(子) 대학(大鶴) 등의 충효열(忠孝烈) 삼강(三綱)을 정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