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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이씨] 이이(李 珥)

작성일 : 2018-08-06 10:55 수정일 : 2018-08-06 10:57

1536(중종 31)~1584(선조 17) 아명은 현룡(見龍), 자(字)는 숙헌(叔獻), 호(號)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찰방(察訪)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강릉(江陵) 출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 초시(進士初試)에 합격,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儒學)에 전심하여 23세때 이 황(李 滉)을 찾아가 만났다.

1564(명종 19) 생원시(生員試)․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초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568(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副敎理)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했다.

그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 율곡(栗谷)과 석담(石潭)에서 학문연구에 전심하다가 1581년 다시 불려 대사헌․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의 판서(判書), 우참찬(右參贊)을 역임, 1583년 당쟁(黨爭)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같은 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등용,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 고 죽었다.

조선 유학계에 이 황(李 滉)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설보다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을 연구하는 태도로 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說)을 근본사상으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성(養成)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조자앙(趙子昻)의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