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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이씨] 이중인

작성일 : 2018-08-07 14:56 수정일 : 2018-08-07 14:58

(시호는충숙)의때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새로이 이왕조가 등장 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흉간을 좌시 할수 없었던 그는 앞날을 개탄한 나머지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절신이다.

이조가 들어서 그를 다시 구성백으로 봉하자 단호히 이를 물리치면서 백이 숙제와 같은 충절이 더렵혀질까 염려된다 하며 머리를 풀고 산에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으시고 자손들 에게도 이조에는 삼대까지 벼슬하지 말라 타이른 다음 못내 이것이 심화가 되어 팔판(팔판서)과 더불어 성거산에 들어가 분신 자결할 것을 모의하고 나무를 산과 같이 쌓아놓았는데 이들 자손들이 찾어와 읍소만류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팔자이고 보니 장차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고 크게 비통해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배위 되시는 천안전씨 족보에도 그가 중서성 상서와,구성부원군이 라고 적혀있으며 곧은 충절을 기리는 찬시 까지도 실려있다. 충숙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묘소는 용인의 삼대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매년 시제가 봉행 되고 있으며 한편 의정부시 송산사에도 조송산,원양촌,김농암,김일노정,유송은 고려 오선생과 같이 배향되었다.

 

용인이문이 그를 중시조로 모시는 것은 시조로부터 선대조 산소를 전부 실전된데다 그의 후손이 가장 번성한 때문이다. 고려말 형조전서를 지낸 그의 장남 이사영은 이성계일파에 몰려 목은이색등이 유배될때 남원 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의 아들 백찬까지 이중인의 손자로 삼대가 벼슬에 나가지 않었다.

그러나 이중인의 둘째아들 이사위는 아버지의 유언과는 달리 고려조에 관찰사등 벼슬을 하고 이조에서도 개성유후를 지냈다.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전환기에 형제가 걷는길은 서로 달랐다.

이사위가 아버지의뜻(불사이군)을 어길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용인이씨 족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선 개국후 이성계는 민심과 정국안정을 위해 인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려유신들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등을 돌렸다. 때문에 유신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은 날로 심했다. 탄압에 견디지 못한 유신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걱정하다가 이사위를 대표로 내세워 벼슬길에 나가도록 종용하였다. 그는 선친의 뜻을 따르지 못한 것을 못내 한스럽게 여기면서도 이같은 동료들의 처지와 개성백성들의 신망을 저버릴수 없어 벼슬길에 나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맡았다 한다.

 

용인이씨는 여러파중 가장 수가 많고 융성을 누리기는 십육세이백지의 후손으로 자손의 수나 벼슬한 수가 전체의 60%에 달한다.

○이백지(태종.관찰사.청백리) ○정호 대선사 ○이행검(단종.병마절도사) ○이담(선조.관찰사) ○이덕회(선조.남원판관) ○이일(선조.무용대장) ○정민(선조.정란공신) ○이사경(광해.대사간) 등은 조선초기의 용인이씨의 인물이다.

그중 이행검은 이징옥의란을 당시 함경도 진무로 있으면서 그를 계략 으로 종성에 머물게 한뒤 붙잡아 진압한 공으로 1등공신 으로 책록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