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8-14 15:04
판병부사문하시중(判兵部事門下侍中)∙시(諡):문진(文眞)
(1201-72) 초명 인기(仁祺) 자 현보(顯甫) 호 약촌(藥村)
고종 때 과거급제, 서경사록(科擧及第, 西京司祿)이 되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교서랑(校書郞) 겸 직사관, 국자대사성, 추밀원승지,(直司館, 國子大司成, 樞密院承旨), 1156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처 1258년(고종 45)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재상(宰相)의 반열에 올랐으며 1260년(元宗 元年)에 참지정사(參知政事) 1262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이듬해 수태부 판병부사 태자태보(守太傅 判兵部事 太子太保)를 더했고 1264년(원종 5)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1267년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고 다음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1271년 벼슬에서 물러나 다음해에 졸했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 한 시대의 큰 글이 그의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또한 몽고와의 승산 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왕과 권신들의 주저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원종임금의 원나라 행을 성사시켰으며 자신이 임금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와 독대 조금도 굴함이 없이 당당히 고려의 입장을 밝혀 첫째, 당시 전쟁종식의 걸림돌이던 출육(임금의 거처를 강화 섬에서 개성으로 옮기는 것) 문제를 해결하였고, 둘째 원나라가 고려에 요구한 막대한 군사(軍士)와 물자(物資)의 징발(徵發)을 줄여 고려백성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로 낮추어 줄 것 등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40여년 전쟁으로 극도로 궁핍하여 하루살이가 힘든 백성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협상과정에서 공이 보여준 높은 애국심, 깊은 학문 그리고 고매한 인격은 마침내 원나라 황제와 대신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원의 세조는 두 차례나 공을 위하여 연회를 열어 주었다. 한사람의 손실 없이 세치의 혀만으로 이루어낸 성과가 백만 대군으로 거둔 수많은 큰 승리보다도 더 값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