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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최씨] 최충헌(崔忠獻)

작성일 : 2019-02-13 13:54

1149(의종 3)~1219(고종 6) 초명은 난(鸞), 시호(諡號)는 경성(景成), 상장군(上將軍) 원호(元 浩)의 아들.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고,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하여 별초 도령(別抄都令)에 올랐다. 이어 섭장군(攝將軍)에 승진하고, 1196년 동생 충수(忠粹)와 함께 권신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당시 누적된 폐정(弊政)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왕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어 왕의 측근자를 모두 추방하고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고 이듬해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의 호를받았다. 한편 왕이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의 낭비만을 자행하자 이해 9월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평량공(平凉公) 민(旼:신종)을 왕으로 추대, 정국공신(靖國功臣)․삼한대광 대중대부(三韓大匡大中大夫)․상장군(上將軍)․주국(主國)이 되어 최씨무단정권(崔氏武斷政權)을 수립했다.

이해 동생 충수가 자기의 딸을 태자(太子:희종)의 비(妃)로 삼으려하자 이에 반대하여 의견 충돌이 일어나 군사력으로 대결하여 박진재(朴晋材) 등의 도움으로 충수의 군사를 격파하고 추격병을 보내 파주(坡州)에서 충수를 죽이게 함으로써 그의 독재정권을 강화했다.

1198년(신종 1) 사노(私奴) 만적(滿積)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듬해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거쳐 병부 상서(兵部尙書)․지이부사(知吏府使)가 되어 군사권과 문무관(文武官)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해 김준거(金俊琚)의 반란을 토벌했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등을 거쳐 1202년 삼중대광(三重大匡)․수태위(守太尉)․상주국(上柱國)이 되고,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문무관 중에서 강용(强勇)한 자를 선발하여 6번(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신변을 보호케 하고출입할 때는 6번을 합해 호위케했다. 이어 추밀원사․이부 병부 상서․어사대부가 된 후 10월 경주 별초군(慶州別抄軍)의 반란을 진압했다.

1203년 모반(謀叛)한 부석사(浮石寺)․부인사(符仁寺)의 중들을 잡아 유배 보낸 후 이어 수태부․참지정사(參知政事)․병부 상서․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고 이듬해 신종(神宗)을 폐하고 태자(太子: 희종)을 옹립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개부의동삼사 ․수태사․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상장군 상주국․판병부 어사대사․태자 태사에 올랐다.

1205년(희종 1) 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特進訏謀逸德安社濟世功臣)․문하시중․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해지고, 1209년 학사 이규보(李奎報)를 발탁함으로써 무신 정권으로 퇴폐했던 문운(文運)의 재흥을 꾀했다. 1209년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감찰하게 함으로써 이후 무인정권의 실질적인 중앙기관이 되었고 1211년 왕준명(王濬明) 등의 음모로 궁궐에서 죽을 뻔했으나 부하들의 구출을 살아난 뒤 왕을 폐위하고 한남공(漢南公) 정(貞 : 강종)을 즉위시켰다.

이듬해 문경무위향리차안공신(文經武緯響理借安功臣)에 봉해졌고, 1213년 강종이 죽자 고종을 즉위시킨 뒤 1217년(고종 4) 그의 암살을 꾀하던 흥왕사(興王寺)의 중들을 잡아 죽였다. 이후 점차 횡포가 심해졌으나 장기간 계속된 민란(民亂)의 진압, 기강의 확립, 풍속의 순화, 문운의 재흥 등 여러 가지 업적을 이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