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2-13 13:56
?~1249(고종 39) 뒤에 이(怡)로 개명, 시호(諡號)는 광렬(匡烈), 충헌(忠獻)의 아들. 1219년(고종 6) 충헌이 죽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뒤를 이어 집권한 후, 처음에는 인심을 얻기에 힘써 아버지가 저축한 금은 보화 등을 왕에게 바치고, 일찍이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주인에게 돌려주고 한사(寒士)를 등용했으며, 1222년(고종 9) 참지정사(參知政事)․이병부 상서(吏兵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명실공히 집정자(執政者)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무렵 몽고의 사신이 자주 와서 많은 금품을 요구하자 이를 냉정히 대접하고는 복변의 여러 성과 개경의 황라성(隍羅城)을 수축하여 몽고의 침입에 대비했다. 1225년(고종 12) 정방(政房)을 자택에 설치하여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했고, 1227년 자택에 서방(書房)을 두어 문객(門客) 중의 명유(名儒)를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했으며, 1228년 오대진국공신(鰲戴鎭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북변에 침범하던 몽고병의 대군이 곧 침범하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왕에게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청하여 천도를 단행케 했으며, 이듬해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일으키자 가병(家兵)으로 이를 토벌하고, 1234년(고종 21) 강화천도의 공으로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지고,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1243년(고종 30)에 국자감(國子監)을 수축(修築)하고, 양현고(養賢庫)에 쌀 3백 곡(穀)을 시납(施納)하는 등으로 장학(獎學)에 힘쓰는 한편 강화에서의 대장경판(大藏經板) 재조(再雕)에 사재를 희사하여뒤에 완성케 했다. 이로부터 차츰 전횡(專橫)이 심해져 백성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천도공신(遷都功臣)으로서 1262년 공신당(功臣當)의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