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2-13 13:57
?~1257(고종 44) 초명은 만전(萬全), 진양공(晋陽公) 우(瑀)의 아들. 송광사(松廣寺)에서 중이 되었다가 1248년(고종 35) 아버지의 명으로 환손(還俗)하여 항(沆)으로 개명하고 임 익(任 翊)에게서 글을, 권 위(權 韙)에게서 예를 배우고,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호부 상서(戶部尙書)를 거쳐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어 아버지에게 가병(家兵)5백 명을 분여받았다.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이병부 상서(吏兵部尙書)․어사 대부(御史大夫)․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어 동북면․서북면의 병마사를 겸하는 한편 교정 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시기심이 많아 이듬해 전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주숙(周肅), 형부 상서(刑部尙書) 박 훤(朴 暄) 등을 죽이고, 중성(中城)을 축성한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진양후(晋陽侯)에 올랐으나 사양했다.
그는 집권 초기에는 각 지방의 별공(別貢)과 어량(魚梁 : 선박세)을 면제하고 또 각 지방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수획원(收獲員)을 소환, 그 임무를 안찰사(按察使)에게 맡기는 등 인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차츰 호사와 향락(享樂)을일삼기 시작했다.
몽고에 대한 정책에는 아버지 우(瑀)의 강경 정책을 계승하여 몽장(夢將) 야굴(也窟)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뒤에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진평공(晋平公)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