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7-26 10:17
이광정(李光庭)
원주이씨 21세, 嶺南 士林의 宗匠, 눌은(訥隱)
1674(현종 15)~1756(영조 32)
이광정(李光庭)공은 경상북도 봉화(奉化)에서 출생했다. 공의 증조부 묘소가 원주시 흥업면 서곡리에 있고 조부 때에 봉화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상당기간 원주에 와서 공부했고 소과(小科)도 원주에서 치렀으며 사마방목(司馬榜目) 원주향교지(原州鄕校誌) 등에 그 명단이 올라있다. 광정공의 조부 시암(時庵)공은 원주인이면서 봉화인이다. 말하자면 봉화지방의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시암공으로 부터 뿌리가 내려 봉화인들의 긍지를 높여 주는 대학자가 나셨고 명문가(名文家)로 성장했다. 시암공은 1607년 26세 때 진사(進士), 27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수재이다.
34세 때 이미 함경도와 강원도의 도사(都事)를 역임했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안동(安東)에 은거했다. 안동은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에서 한양을 제외하고 과거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웬만한 가문과 학문의 배경이 없고서는 감히 범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러한 안동에 들어가 시암공께서는 많은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38세 때 병이 깊어 신병을 치료하려고 봉화로 이사했으니 공의 안동생활은 약 4년 정도였다. 문집(文集) 4권이 전한다.
광정공의 자(字)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또는 녹문산인(鹿門山人)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九세에 논어를 모두 외웠고, 十五세에 六경을 통달한 천재였다. 그러나 세상 명리에 뜻이 없어 진사시에 올라 사마방목에 올랐을 뿐 대과는 외면했다.
재신(宰臣)들의 추천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 등으로 등용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해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성리학을 강론했는데 문하생이 五백명을 넘었다.
광정공은 효도와 우애가 남다르고 덕행과 절개와 지조가 맑고 깨끗해서 영남 일대에서 유학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았다. 영남 사대부 가문에서는 눌은공의 문장이나 시 한 편이라도 서재에 비치해야 선비로서의 자긍심이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후일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문장(文章)은 영남일대에서 백년 이래 이런 글이 없었고 그 빛이 창연하여 뒤에 드리움이 분명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광정공은 숱한 유문집(遺文集)을 남겼다. 손자 종훈(宗勛)공과 문인(門人)들이 초고(草稿)를 정리하여 두고 자금사정이 어려워 출판하지 못했다. 돌아가신지 五十二년 뒤인 1828년 二十二권 十一책 八六一판(板)의 목판 초간본(初刊本)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화재로 소실된 글도 많다고 하니 아쉽다.
이때 교정(校正)을 본 분들이 명재상으로 알려진 채제공과 이상정(李象靖)선생이었다. 눌은문집의 위상이 어떠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분들이 눌은공을 얼마나 흠모하고 높게 평가했는지 여러 곳에서 격찬하는 글이 발견된다.
지금 목판 원본은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초간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돼 있다.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강원대학교 등에서 이를 교재로 활용하며 ⌜눌은 연구⌟로 배출된 석사 박사도 많다.
눌은문집을 살펴보면 사(辞) 부(賦) 시(詩) 서(序) 소(疏) 서(序) 기(記) 발(跋) 식(識) 명(銘) 찬(贊) 행장(行狀) 전(傳) 유사(遺事) 등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다.
1756년 광정공께서 돌아가시니 조정에서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증직을 내렸다. 이는 종二품으로서 대학자에 대한 지극한 예우였다고 할 수 있다.
八十三세로 돌아가셨는데 채제공 선생이 묘갈명(墓碣銘·비문)·이헌경(李獻慶)선생이 묘지명(墓誌銘 : 죽은 사람의 행장 따위를 적어 관과 함께 묻는 글)·이상정(李象靖)선생이 행장(行狀 : 죽은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김한동(金翰東)선생이 유권(遺券)에 대한 뒷글을 찬(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