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字)는 진여(進汝)이고 호(號)는 자하(紫下)이며 장세헌(張世憲)의 아들이다. 어릴 적에 성품(性稟)이 온화(溫和)하고 의협심(義俠心)이 강했다. 고종(姑從) 여심연(呂心淵)에게 수학(修學)하여 사서(四書)육경(六經)에 통달(通達)하였으며 후진(後進)양성(養成)을 위한 교육(敎育)에 전념(專念)하였다. 한일합방(韓日合邦) 후(後) 성주(星州)군수(郡守) 경찰서장(警察暑葬)의 명의(名義)로 일본왕(日本王) 명치(明治)의 생일(生日) 축하(祝賀) 행사(行事) 초청장(招請狀)에 불응(不應)하여 국경(國慶)반대자(反對者)로 호출장(呼出狀)을 보냈으나 “내 목이 굶어 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怨讐)놈의 부름에 발을 옮길 수 없다”하고 호통(號筒)을 치며 출두(出頭)하지 아니하여 일경(日警)이 결박(結縛)하여 가니 부인박씨(夫人朴氏)는 “집안 일은 걱정말고 대의(大義)를 밝히시라.” 격려(激勵)하였다. 갖은 고초(苦草)를 받고 1911년 1월 5일 27일 만에 옥중(獄中)에서 향년(享年) 52세로 눈을 김으니 장례(葬禮) 차(車)가 대구시내(大邱市內)를 나오니 점포(店鋪)에 문(門)을 닫고 거리(距離)에 나와 통곡(痛哭)하는 자가 수만(數萬) 명(名)에 이르렀다. 1911년 3월 8일 경북(慶北)도내(道內) 유림(儒林) 수만(數萬) 명(名)이 장례식(葬禮式)을 거행(擧行)함에 만장(輓章)이 수천(數千)이요 제문(祭文)이 수백(數百)이라 이후(以後) 전국(全國) 유림(儒林)이 의논(議論)하여 선생(先生)의 충의(忠義)를 기리기 위해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를 모방(模倣)해 자양산(紫陽山)에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