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년(명종5)-1669년(인조8) 자 사수(字 士受) 號 閒湖 경호공 휘흥(敬胡公 諱興)의 7대손이고 부호군 휘돈(副護軍 諱墩)의 장남인데 석성 향교(石城 鄕校)에서 수학 중였던 공(公)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발발로 그 병화가 이곳 석성 성묘(石城 聖廟)를 휩쓸 때 16세 소년으로 화염을 무릅쓰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 신주(神主)를 무사히 받들어 모신 후 편법으로 모옥(茅屋)으로 옮겨 편안히 봉안(奉安)하였고 그후 병란(兵亂)으로 산질(散○) 된 서적을 사재(私財)를 기울여 구입 성묘학궁 (聖廟學宮)에 비치함으로서 학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으며 1621년(광해군13)현감 윤겸선(尹兼善)과 더불어 공(公)이 주관하고 진사 이경정(李景鼎), 유학 박시승(朴時昇), 통덕랑 이경술(李景述), 유학 전석구(田錫龜) 등 유생들을 이끌고 성묘(聖廟)와 강당 동서재사(東西齋舍) 고구(庫구) 포벽(包湢) 등을 중수(重修)하였다. 공(公)의 이와 같은 공로로 유생들이 머물러 정진(精進) 할 곳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공(公)은 1612년(광해군4) 진사사마방(進士司馬榜)에 올랐으나 벼슬길을 마다하시고 성현(聖賢)들의 학풍(學風)과 학행(學行), 학덕(學德)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고 사계 김장생 선생(沙溪 金長生 先生) 문하에서 수학, 마침내 대유(大儒)가 되어 한호정사(閒湖精舍)를 세워 후학들을 교화훈도(敎化訓導) 하시였다. 공(公)이 하세(下世) 하신후 공(公)의 학풍과 학덕을 우러러 받드는 유림에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영령을 편안히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홍유지사(鴻儒志士)가 되었다. 한편 공(公)께서는 1665년(현종6) 통정대부(通政大夫) 1666년(현종7)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龍驤衛 副護軍)에 제수 되어 특별히 붉은 관북과 옥관자를 하사 받은 은전(恩典)을 입었는데 이듬해 93세의 나이로 하세(下世) 하셨다. 공에 관한 문헌은 석성 현학 명윤당 중수기(石城 縣學 明倫堂 重修記) 가선대부 지중추부사 성균진사공행장(嘉善大夫 知中樞府事 成均進士公行戕) 봉호사 게판문(蓬湖祠 揭版文) 석성향교대성전 중수기(石城鄕校大聖殿 重修記) 석성문행록(石城文行錄) 한호공 묘표(閒湖公 墓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