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9-09 12:03
1845(헌종 11)~1884(고종 21) 자(字)는 기삼(箕三), 호(號)는 혜인(惠人), 시호(諡號)는 충문(忠文), 병석(秉錫)의 아들, 총융사(摠戎使) 병기(秉夔)에게 입양.
1863년(철종 1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가 되고 다시 섭정(攝政)하던 조대비(趙大 妃)의 총애를 받아 1865년(고종2) 대사성(大司成)에 특진했다.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873년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재직중 민승호(閔升鎬) 등 민씨일족과 결탁하여 당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을 탄핵한 최익현(崔益 鉉)과 함께 대원군 세력의 추방에 앞장섰다.
이해 고종의 친정(親定)이 선포되면서 대원군이 실각하자 이듬해 금위대장(禁衛大將)에 발탁(拔擢)되고 이어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훈련대장(訓練大將)을 역임, 1876년 지경연사(知經筵事)․공조 판서, 이듬해 예조 판서, 1880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상호군(上護軍)으로 통리기무아문 당상(堂上)이 되고 이듬해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사대교린 당상(事大交隣堂上)․전선어학사당상(典選語學司堂上)․병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점차 사대당(事大黨)의 중진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882년 전권대관(全權大官)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를 접견하였고, 이해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수호조규(修好條規)를 각각 체결했다.
이해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좌천되었다가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임오군란(壬午軍亂) 주동자의 색출과 대원군의 납치를 실현하게 하여 마침내 민씨 세력의 재집권을 가져오게 했다.
이해 다시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가서 기계․무기 등을 수입하여 관세(關稅)․외교(外交) 담당 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초빙, 입국케 했다. 그후 판리통리아문사(辦理統理衙門事務)․독판통상사무(督辦通商事務)․도통사(都統使)를 역임, 1883년(고종 20) 예조 판서에 재임되고, 이듬해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