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9-09 12:04
1862(철종 13)~1926 초명(初名)은 석구(晳九), 자(字)는 미경(米卿), 호(號)는 월파거사(月坡居士), 판서봉하(鳳夏)의 손자, 동석(東奭)의 아들,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副承旨)․제학(提學)․대사성(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직제학(直提學)․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기로소비서장(耆老所秘書長)을 지낸 후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재직중에 한일합방이 되자 합방 조서(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고, 일본 정부가 주는 남작(男爵)을 거절했다.
그후 양주군 사릉리(楊洲君思陵里)에 은거하다가 금강산 반야암(般若庵)에 들어가자 결을 기도했으나 1919년 고종(高宗)이 별세하자 상경, 인산(因山)을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7년 동안 유랑하며 지내다가 둘째 아들 남익(南益)이 죽은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