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11-12 11:21
1827(순조 27)~1898(광무 2) 초명은 경상(慶翔), 호(號)는 해월(海月), 종수(宗秀)의 아들. 조선말기(朝鮮末期) 동학(東學)의 제 2대 교주(敎主).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하다가 1861년(철종 12)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崔濟愚)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이듬해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그 후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울진(蔚珍)등지로 전전하며 포교(布敎)에 힘썼다.
1871년(고종 8) 이필제(李弼濟)가 그의 승낙없이 교조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民亂)을 일으켜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少白山)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그 뒤 영월(寧越)을 거쳐 인제(麟蹄)에 가서「동경대전(東京大典)」을 간행하고 이어 단양(丹陽)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등 경전(經典)을 완성,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 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손병희(孫秉熙)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이 숙청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자, 이듬해 2월 제 2차 신원운동을 전개,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하여 각 도의 동학대표자 40여 명을 보내어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고 대궐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으로부터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받고 일단 해산했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보은(報恩)의 대도소(大刀所)에 전국 교도들의 집결을 명령하는 한편, 교조의 신원과 부패․관리의 처단 및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등 탐관이 파면되자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건을 언금하도록 시달했으나,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琒準)이 농민과 동학도를 지휘하여 동학혁명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이에 호응, 북접 각지의 접주(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관군(官軍)․일본군의 연합군과 공주(公州)에서 싸워 참패, 논산을 거쳐 장수(長水)등지에서 연패하고 영동(永同)․청주(淸州)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原州)에서 송경인(宋敬仁)에게 피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伸寃)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