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11-12 14:22
1890(고종 27)~1957 아명은 창흥(昌興), 교명은 베드루, 자(字)는 공륙(公六), 호(號)는 육당(六堂), 헌규(獻圭)의 아들. 자습으로 국문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황성신문(皇城新聞)」에 글을 투고(投稿), 이듬해 경성학당 (京城學堂)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익혔다.
1904년 황실유학생(皇室留學生)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일(渡日), 도오꾜오 부립중학교(府立中學校)에 입학했으나 3개월만에 귀국했다가 1906년 다시 도일, 아세다 대학 고사부 지리역사과(高師部地理歷史科)에 입학하여 유학생 회보인「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고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模擬國會)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自宅)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출판과 인쇄를 했으며, 이듬해잡지「소년」을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적인소설을 실어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문헌 보전(古文獻保存)을 위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913년 다시「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청춘(靑春)」을 창간했다. 3․1운동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起草)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가출옥(假出獄)되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하여 주간지「동명(東明)」을 방행하는 한편 국사연구(國史硏究)에 전심했다.
1924년「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경영권문제로 보천교(普天敎)와 대립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客員)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논문「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하는 한편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위원회(朝鮮史編修委員會)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강사를 지냈다. 1938년만주 신경(新京)에 가서「만몽일보(滿夢日報)」고문으로 있다가 이듬해에 재만 일본 관동군(在滿日本關東軍)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에서 교편을 잡았고, 귀국 후 1943년 재일(在日) 조선 유학생의 학병(學兵) 지원 권고 강연차 이광수․김연수(金秊洙)․이성근(李聖根)등과 도오꾜오(東京)에 건너갔다.
해방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歷史論文) 집필에 전심하다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기소,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사변 때 해군전사 편찬위원회(海軍戰士編纂委員會) 촉탁을 지낸 후 서울시사 편찬위원회(市史編纂委員會)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 관계의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죽었다.
박람강기(博覽强記)했고, 신문화 수입기에 있어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며, 이원(利原)의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다.
최두선(崔斗善) 1894~1974 호(號)는 각천(覺泉), 육당 최남선의 동생. 서울 출신. 1917년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19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1932년 보성전문학교 상무를 거쳐 8․15해방 후 경성방직 사장, 1947년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1960년 유엔 총회 한국대표, 대한 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으며,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을 개최하고 1963년 국무총리, 1965년 대통령 특사로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청조소성훈장(靑條素星勳章)과 국민훈장무궁화장, 독일연방공화국의 공로훈장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