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7년~1579년) 1528년(중종23) 중종이 영릉(英陵)에 행차하여 친시에서 무과로 합격하여 강진, 청도 군수로 있으면서 군민 구휼(救恤)에 진력한 공으로 김해부사로 나갔다. 이어 양주목사, 회령부사를 지내면서 지극히 어질고 관리로서 들고남에 청렴을 본보기로 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니 고을마다 선정비가 세워져 그 이름이 드높았다. 1579년(선조12)에 별세하니 작은 오두막집에 염습도 할 수 없는 처지를 알게 된 왕께서 영상 박순(朴淳)에게 교지를 내려 청백리(淸白吏)로 포장(褒章)하였으며 정2품으로 승차, 후(厚)히 장례를 치르고 박순에게 제문(祭文)을 짓게 하고 제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박순이 제문에 이르기를 “공은 청렴 근면하였으며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여 끝까지 감내하며 백성들의 번뇌와 갈망하는 바를 저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害)되지 않도록 힘을 기울인 행적(行蹟)이 뚜렷하고 남녘에 출사(出使)하여서는 어지러워진 질서를 수습하여 백성들의 근심걱정을 덜어주었다. 양잠방적(養蠶紡績)과 율무 재배 등을 권장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고 북쪽 관문을 다스릴 때는 수많은 일을 도모함에 솔선수범하여 권장하였으며 신명(身命)을 다하여 백성들의 편안함을 구(救)하였다. 분별력이 뛰어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시정(施政)하였으며 국왕을 호위(護衛)함에는 그 충성심이 시종여일(始終如一)하여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건만 어쩌다 슬하에 무자(無子)로 별세하니 무한히 비통(悲痛) 이를데 없다. 이에 우매한 예관(禮官)은 높으신 신위(神位)께 엄숙히 주작(酒灼)을 올리나이다”고 하였다.
이에 감동하여 지제교(知製敎) 류근(柳根)이 글을 짓고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박란(朴蘭)이 찬지(撰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