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5년~1682년) 자는 문보(文父) 또는 화보(和父)이고 호는 미수(眉叟) 또는 태령노인(台嶺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나면서 손바닥에 글월문(文)자와 발바닥에 우물정(井)자가 있었다고 하며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다 하여 호를 미수(眉叟)라고 했다. 아버지 허교(許喬)의 임지인 거창(居昌)으로 따라가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사사하여 원근의 많은 학자들과 종유하여 영남학통(嶺南學統)을 이었으며 1626년(인조4) 32세 때 성균관 동학재임(東學齋任)으로서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를 유적(儒籍)에서 처벌한 일로 과거를 못보게 한 왕명으로(뒤에 해벌(解罰)이 되었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의 명소와 산천을 주유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으며 지방의 사림(士林)들과 많이 종유했다. 1650년(효종1) 박학능문(博學能文)하며 그 뜻이 고상하다고 추천되어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곧 사퇴하고 1659년(효종10) 사헌부장령이 되자 옥궤명(玉几銘)을 지어올리고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1660년(현종1) 기해복상(己亥服喪)의 잘못을 상소했다가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되어 2년간 많은 치적과 교화(敎化)를 남겼다. 1675년(숙종1) 이조참판,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이조판서로 옮겼다가 우의정에 올랐다.
30년간 공직에 있었으나 타고난 학자적 체질로 행정 또는 정치권력의 직접적 집행보다는 학자로서 또는 왕사(王師)의 입장에서 임금께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에 관한 의견을 올려 치도(治道)가 바로서게 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예이론(禮理論)의 일인자로서 노론(老論)측의 예론과 대립하였지만 승리를 거두어 왕권의 강화를 통한 왕조질서(王朝秩序)의 확립을 이룩했고 기언(記言), 경례유찬(經禮類纂) 등 방대한 저술(著述)로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한편 서화에도 뛰어나 고전(古篆)에 바탕하여 독창(獨創)한 전서(篆書)는 동방(東方) 제일이며 삼척의 동해비(東海碑)에 새겨진 동해송(東海頌)과 고문운율(古文韻律) 등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나라에서 궤장(几杖)을 내리고 집을 지어주는 특별한 예우는 세종 때 황희(黃喜), 선조 때 이원익(李元翼)과 미수(眉叟) 세 분이다.
사림(士林)들이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의령 미연서원(嵋淵書院), 마전(麻田)에 미강서원(嵋江書院), 나주 미천서원(眉泉書院), 마산 회원서원(檜原書院),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 부여 도강영당(道江影堂) 등에 배향(配享)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찬한 신도비(神道碑)에서 “500년 조선조 대신 중에 대신다웠다고 평하면서 조금도 권력에 아부하거나 연연함이 없이 오직 정의를 지키기에 힘썼고 마땅히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서서 진퇴(進退)를 분명히 했으며 열심히 옛것을 연구하여 그 진리를 깨우쳤으며 욕되지 않고 절조를 지키며 명분을 살려서 명예에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