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1886년) 자는 이로(而老)이고 호는 성재(性齋)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에게 수학하였으며 1820년 부친 허형(許珩)의 상(喪)을 당하여 법복편(法服篇)을 저술하고 1835년(헌종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고 함평현감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4년동안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학하였다. 1856년(철종7) 우부승지에 제수되고 병조참의에 승진, 사의(士儀)를 완성하고 수전록(受廛錄)과 종요록(宗堯錄)을 완성하여 삼정(三政)의 대책을 올렸다. 1864년(고종1)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에 제수되어 매월 초하루마다 명륜당(明倫堂)에서 강학(講學)하고 향약(鄕約)을 더 만들어 교육사업에 힘써 김해를 중심으로 경상도에 학문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고 임금이 말씀하기를 “그대가 부(府)에 부임한 뒤로부터 선비들이 훌륭한 스승을 얻었다는 명성이 있다”하고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고 1873년(고종10) 자헌대부로 승진,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형조판서가 되고 특별히 홍문관제학으로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에 제수되어 성헌잠(誠軒箴)을 지어올렸고 철명편(哲命篇)을 올리고 1881년(고종18)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숭정대부에 가좌되고 흥선대원군의 귀국을 시켜야 한다는 글을 올렸으며 다음해 보국숭록대부 판의금부사(輔國崇祿大夫判義禁府事)를 제수했다. 사후 경상도 유림들이 산청에 이택당(麗澤堂)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문인들이 성재집(性齋集)을 간행하였다. 양천허씨족보증수서를 1852년(철종3)에 서술하고 또 1868년(고종5) 양천허씨세고 발문을 썼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 영남학파의 계승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