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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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11-09 15:25 수정일 : 2018-01-31 10:15 작성자 : 관리자

신천강씨시조 및 신천강씨유래

강씨(康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경조(京兆: 섬서성 남부 장안현 부근 일대를 차지하는 행정구역) 출신 인 주()나라 왕족(王族) 강숙(康 叔)이다.

우리나라 강씨 (康氏)의 연원(淵源)은 강숙의 둘째 아들 강후(康侯) 68세손 강호경 (康虎景: 新羅聖骨將軍)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다.


강씨 (康氏)의 중시조(中始祖)는 호경 (虎景)14세손으로 고려 (高麗) 고종(高宗) 때 호종공신(潭從功臣)에 오르고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진 충렬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이다. 강씨(康氏)의 본관 (本貫)은 신천(信川곡산(谷山재령(載寧)을 비롯하여 충원(忠原진주(晋州) 강령 (康翎)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현존(現存)하는 강씨 (康氏)는 신천 (信川)과 곡산(谷山재령(載寧) 3본이 대종(大宗)을 이룬다.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에 의하면 중시조(中始) 지연(之淵)은 고려 명종(明宗: 고려 제19재위기간: 1170-1197)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1231(고려 고종 18) 몽고군의 개경(開京)침략으 로 이듬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 도읍을 옮김)할 때 왕()을 호종(還從)하여 호종공신(墨從功臣)에 올라 신성 (信城: 신천의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신천(信川)으로 하게 되었고. 제주(濟 州)의 조천서원(朝天書院), 전주(全州) 기린사(麟祠). 고창(高敞) 신산사(新山祀)에 배향(配享)되었다 그 후 지연(之淵)7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을 파조()로 하는 곡산파(谷山派), 8세손 안릉부원군 (安陵府院君) 득룡(得龍)을 파조(派祖)로 하는 재령파(載 寧派)로 크게 갈리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림학사 (翰林學士)와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지낸 영암공(巖 公) ()을 신천강씨 (信川康氏)의 제주(濟州) 입도시조 (入島始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신천(信川) 황해도 중앙무에 위치한 지명으로 단군 신화에 담긴 아사달산(阿斯達山) 당장경(唐藏京)이 있었던 곳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 시대에는 승산 군(升山郡)이었다. 그 후 고려(高麗) ()에는 신주 (信州)로 불렀고 1413(태종 13) 지금의 신천(信川)으로 개칭(改稱)되었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중시조(中始) 지연(之淵)6세손 윤성(允成)이 고려 충혜왕(忠惠王:고려 제28대왕, 재위기간;13301332, 복위 13391344)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이부 시랑(吏部侍郞)등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방번방석과 경순공주를 낳았음)가 되어 상산(象山:곡산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이 곡산(谷山)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한편 재령파(載寧派)의 파조(派祖)인 안정공(安靖公) 득룡(得龍)은 중시조(中始組) 지연(之淵)8세손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고려 제31대왕, 재위기간:13511374) 때 삼사우사(三司右使:국가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던 정2품 벼슬)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악산(冠岳山) 의상대(義湘臺)에 올라가 송경(松京:개성)을 향해 통곡하니 이때부터 이곳은 연주대(戀主臺)라 불리웠고, 태조(太祖)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그를 안릉(安陵:재령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했다.

또한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인 영암공(瀛巖公) ()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사촌 오라버니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으며, 왕자의 난(조선 개국 초 태종의 아들 방원과 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으킨 두 차례의 난)이 일어나자 피신하여 제주(濟州)에서 일생을 마침으로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고려의 무신(武臣)인 조()가 도통사(都統使:각 도의 군사를 통솔하는 무관직 벼슬)를 지냈으며, ()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예종(睿宗:고려 제16대왕, 재위기간:11051122) 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강령 강씨(康翎康氏)로 분적(分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증손(曾孫) ()1453(단종 1) 회령부사(會寧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지낸 뒤 1457(세조 2)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7(세조 12)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홍원(洪原)북청(北靑)만령(蔓嶺) 등지에서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되자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으로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천강씨는 남한에 총 52,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신천강씨조상인물

강보전(康寶甸): 문하(門下) 태학사(太學士)를 역임

강보육(康寶育):호(號) 죽헌거사(竹軒居士) 고려 태조(高麗 太祖) 의조(外祖)로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追尊)되었다.

강순산(康淳山):신라(新羅) 좌정승(左政丞)을 역임

강 적(康 迪): 신라(新羅) 평장사(平章事)를 역임

강진의(康辰義):(女) 당선종(唐宣宗) 구보(舊譜)에 이르기를 당(唐) 숙종(肅宗), 태종(太宗) 평현(評見) 사실(事實), 자(子) 작제건(作帝建),고려왕씨(高麗王氏) 의조(懿祖) 경강왕(景康王), 손(孫) 융(隆) 고려(高麗) 세조(世祖) 위무왕(威武王), 증손(曾孫) 건 (建) 고려 (高麗) 태조(太祖) 신성왕(神聖王)이다

강시필(康時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門下) 좌찬성(左贊成)을 역임

강 조(康 調) ? ~ 1010 (현종 1)

고려(高麗) 목종(穆宗) 때 중추원사(中樞院事)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된 후에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로 부임했다. 1009(목종 12) 김치양(金致陽)이 천추태후(千秋太后:목종모)와 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왕명으로 개경(開京)을 지키려고 동주(洞州:서흥)까지 이르렀으나 여기서 김치양 일파가 자기를 제거 하기 위해 왕명을 사칭했다는 소문을 듣고 본영으로 되돌아 갔다.

뒤에 아버지로부터 다시 왕은 죽고 간신들이 국사를 전횡 한다는 연락을 받고, 5천의 군사를 이끌고 평주(平州)에 도착, 왕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았으나 마침내 폐립(廢立)을 결심,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대량원군(大良院君:현종)을 옹립하고 치양과 태후을 일파를 모두 제거,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살해했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중대사(中臺使)가 되었고, 이듬해 목종 살해 사건을 문죄(問罪)한다는 구실로 거란(거란)의 성종(聖宗)4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자 행영 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30만 군대를 이끌고 통주(通州)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사로잡혔다. 성종(聖宗)으로 부터 신하가 될 것을 권유받았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 살해당했다.

강 증(康 木丞) 1049 (문종 3) 1120 (예종 15)

시호(諡號)는 경양(경양), 인우(仁祐)의 손자. 국사(國事)로 죽은 할아버지덕으로 양온사()가 되고, 뒤에 군기주부 동정(軍器主簿同正)에 올라, 영인진 판관(寧仁鎭判官)진명도부서 부사(鎭溟都部署副使)로 출전, 여진(女眞)과 싸워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숙종(肅宗)초에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고, 1098(숙종 3) 중윤(中允), 1101년 고공낭중(考功郎中)어사 잡단(御史雜端)에 승진, 뒤에 동북면 병마판관(東北面兵馬判官)이 되어 또 여진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올랐다. 1105(예종 즉위)에 지어 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고, 1107(예종 2) 윤 관(輪 關)의 여진정벌때 좌군지병마사로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올라 1111(예종 6)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위에 어사 대부(御史大夫)형부 상서(刑部尙書)호부 상서삼사사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다.

1116(예종 11) 수사공(守司空)참지정사(參知政事)판상서형부사 겸 태자소부(太子少)가 되고,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사직했다.

강순의(康純義) 1199(신종 2)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김준거(金俊琚)이적중(李勣中) 등의 반란 때 최충헌(崔忠獻)의 명령으로 이적 중을 잡아 죽이는 등 공을 세워 장군(將軍)이 되었다. 1202(신종 5) 경주(慶州)에서 패좌(孛佐)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섭대장군(攝大將軍)으로 초토처치 병마우도사(招討處置兵馬右道使)가 되어 김척후(金陟侯)최광의(崔匡義) 등과 함께 이를 토벌했다.

강지연(康之淵)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고종조(高宗朝)에 몽고란(蒙古亂)이 일어나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할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으며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충렬왕(忠烈王)때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제주(濟州)의 조천서원(朝天書院)과 고창(高敞)의 신산사(新山詞)에 제향되었다.

강숙재(康淑才) 고려(高麗) 때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했다.

강수형(康守衡) 진주(晋州) 출신. 몽고어에 능하여 원()나라 궁정(宮廷)에서 고려 관계의 통역을 맡았다.

1274년 충렬왕이 죽위하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판위위시사(判衛尉侍事)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275(충렬왕 1) 원나라의 악탈연(岳脫衍)과 함께 관제(官制)와 칭호(稱號)변경의 문제 및 상호통혼(相互通婚)에 관한 원나라 세조(世祖)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다. 원나라에서 동경총관(東京摠管)이 되고, 1278년 고려에서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가 되었다.

강윤소(康允紹) 원종(元宗)의 총애를 받아 낭장(郎將)을 거쳐 장군(將軍)에 승진하고, 1268(원종 9) 김 준(金 俊)을 죽일 때, 주동 역할을 하여 1등공신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그후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충렬왕(忠烈王)때 군부 판서(軍簿判書)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密直副使등을 지내고, 1283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강 서(康 庶)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강윤명(康允明) 충청도(忠淸道)출신. 1286(충렬왕 12) 에 영월 현령(寧越縣令) 이순(李恂)의 혹정(酷政)으로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자, 역부(驛夫)와 무뢰배(無賴輩)들을 선동하여 원()나라 신황제(新皇帝)의 사자라 사칭하고, 이 순을 죽였다.

다시 충청도 안집사(忠淸道安集使) 이영주(李英柱)를 죽이려다 도리어 그에게 체포되었다.

강윤성(康允成) ()는 대경(大卿), ()는 용담(龍膽),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한림학사(翰林學士)이부 시랑(吏部侍郞)판삼사사(判三司事)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등을 역임하였고, 이태조(李太祖)의 국구(國舅)로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경안백(慶安伯)에 추봉되었다.

강윤충(康允忠) ? 1359 (공민왕 8)

충숙왕(忠肅王) 때 호군(護軍)을 지내고 조 적(曺頔)의 난 때 왕을 시종한 공을 1342(충혜왕 복위 3) 1등공신에 올랐다. 뒤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 다음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양광전라경상 삼도 문민질고사(楊廣全羅慶尙三道問民疾苦使)가 되었다.

충목왕(忠穆王) 때 찬성사(贊成事)에 올랐으며, 충목왕의 어머니 덕녕공주의 총애를 받았다. 1347(충목왕 3) 정조사(正朝使)로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54(공민왕 3)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그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강 탁(康 度) 고려 때 충원백(忠原伯)에 봉하여졌다.

강윤휘(康允暉) ()는 광길(光吉), ()는 진암(震庵), 시호(諡號)는 정숙(靖肅).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도판서(版圖判書)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등을 역임하였으며, 그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제주(濟州) 조천서원(朝天書院)에 제향되었다.

강순룡(康舜龍) ()는 화곡(化谷), 시호는 문원(文元),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아들. 원나라에 들어가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을 지내고 1354(공민왕 3) 본국에 돌아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이해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은성부원군(銀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강득룡(康得龍) 시호(諡號)는 안정(安靖).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추성좌리공신(推誠左理功臣)에 오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하였으며,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강호문(康好文) 자는 자야(子野), 호는 매계(梅溪).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1362(공민왕 11) 문과(文科)에 급제, 뒤에 판전교시사(判典敎侍事)에 이르렀다. 부인 문씨(文氏)1388(우왕 14) 왜적(倭賊)이 쳐들어왔을 때 왜적에게 붙들려 가던 중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절별에서 뛰어내려 탈출, 열녀(烈女)라는 칭송을 받았다.

강원기(康元紀) ()는 봉호당(鳳湖堂),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조선(朝鮮)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하였다.

강 영(康 永) ()는 구방(久芳), ()는 영암(瀛巖).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등을 거쳐 전라 감사(全羅監司)에 이르렀다. 북제주(北齊州)의 조천서원(朝天書院)에 제향되었다.

강 이(康 理)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강계권(疆界權) 조선조(朝鮮朝)에서 상산군(象山君)에 봉하여졌다.

강 유(康 旒) ()는 돈암(遯菴). 세종(世宗) 때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가 되었고, 1454(단종 2) 왜구가 침범했을 때 병마수군첨절제사(兵馬水軍僉節制使)가 천거되어 수천명의 적을 베어 신장(神將)으로 불리웠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 랐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무령(武靈)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며 절의(節義)를 지켰고, 당대의 석학(碩學) 김시습(金時習)등과 교우 하며 일생을 마쳤다. 고창(高敞)의 신산사(新山祠)에 제향되었다.

강 순(康 純) 1390 (공양왕 1) 1468 (세조 13)

자는 태초(太初), 시호는 문정(文靖), 윤성(允成)의 증손. 음보(蔭補)로 무관(武官)에 등용되어 1450(세종 32)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에 오르고 1453(단종 1) 회령부사(會寧府使)를 거쳐 1456(세조 1)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지낸 뒤, 이듬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 판영북진도호부사(判寧北鎭都護府事)에 올라 여진(女眞) 정벌에 참가, 그 공으로 종성 절제사(鍾城節制使)가 되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홍원(洪原)북청(北靑)만령(蔓嶺) 동지에서 적을 대파, 난 을 평정했다. 그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고,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해 건주위(建州衛) 이만주(李滿住)의 토벌 때 서정장군(西征將軍)으로 좌장군(左將軍) 어유소(魚有沼), 우장군 남 이(南 怡)와 함께 정예군 1만을 거느리고 건주위의 파저강(婆猪江) 올미부(兀彌部)의 여러 요새를 소탕했다.

1468(세조 13)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반란을 꾀했다는 류자광(柳子光)의 무고로 국문(鞠問)을 받던 남이가 고문에 못이겨 그와 함께 모반에 가담했다고 발성하자 체포되어 남 이와 함께 사형되었다. 1818(순조 18) 누명이 풀리고 복관(復官)되었다.

강풍실(康豊實) ()는 갑진(甲辰), ()는 일재(逸才). 조선 때 문인(文人)으로 명성을 얻었다.

강윤희(康允熙) 조선에서 신천군(信川君)에 봉하여졌다.

강 려(康 戾) 조선조(朝鮮朝)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강 곤(康 袞) 1411 (태종 11) 1484 (성종 15)

시호는 공양(). 무과(武科)에 급제, 내금위(內禁衛)에 속한 무장으로 1452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수행, 이듬해 癸酉靖難에 가담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이 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러 신천군(信川君)에 봉해졌다.

1458(세조 3) 성절 겸 천추사(聖節兼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거쳐 1468(세조 13) 남이(南 怡)의 옥사 때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봉해지고, 전라도 절도사(全羅道節度事)가 된 후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 功臣) 3등이 되었다. 1474년 영안도 병마절도사(永安道兵馬節度使)로 부임, 민폐(民弊)로 일소했고, 1476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

강효문(康孝文) ? 1467 (세조 12)

자는 자무(子武), 여중(汝中)의 아들. 1451(문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455(단종 3)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1458년 이조 정랑(吏曹政郞)이 되었다.

이듬해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 변방 야인(野人)의 정세를 탐지하여 구방대책을 세웠고, 1460년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道節制使) 양 정(楊 汀)의 휘하에서 야인들을 토버하는 데 공을 세워 가자(加資)되었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예조 참의(禮曺參義)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 북정군(北征軍)의 공신록(功臣錄)에 책록되고 1461년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었다.

1466년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함길도 절도사(咸吉道節度使)가 되어 이듬해 관내의 각 진관(鎭管)을 순시중 길주(吉州)에서 반란을 계획하던 이시애(李施愛)의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모반혐의로 죽였다는 이시애의 계문(啓文)으로 세조의 분노를 샀으나 후에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다.

강 진(康 晋) 조선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강 복(康 福) 조선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강 신(康 愼) 조선조(朝鮮朝)에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강 근(强 慬) 조선조에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강응겸(康應謙)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강백진(康伯珍) ()는 자온(子鞰), ()는 무명재(無名齋),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77(성종 8) 문과에 급제한 후 문학(文學). 정언(正言)예부정랑(禮部正郞)수찬(修撰)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거쳐 사간(司諫)을 역임하고 함안(咸 安)흥해(興海)고을을 다스렸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극형(極刑)을 받았으며 그후 대사간(大司諫)에 추증(追增)되었으며,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강중진(康仲珍) 1459 (세조 4) ?

자는 자도(子鞱), 호는 임경당(臨鏡堂). 외삼촌인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 1495(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성주목사(聖州牧使)로 나갔고, 1506(중종 1) 헌납(獻納)이 되었다.

1510년 군관(軍官)이 되어 웅천(熊川)에 거주중이던 왜인들이 쓰시 마도(對馬島) 왜인들과 함께 분란을 일으키자 이의 평정에 공을 세웠고, 濟用監正으로 쓰시마도경차관(對馬島敬差官)을 겸직, 왜구들을 토벌했다. 수찬(修撰)이 되어 판교(判校)로 재직 중 1519년 기묘사화 (己卯士禍)때 장류(杖流)되었다.

강 혁(康 赫) ()는 일재(逸齋). 1480(성종 11) 문과에 급제한후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지내면서 청주진관 병마절제도위(淸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직(兼職)하였다.

강 욱(康 昱) 1534(중종 29) 진사(進士)가 되었고, 그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공조 좌랑(工曹佐郞)정언(正言)을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다.

그후 공조 참의(工曺參議)도승지(都承旨)판결사(判決事)예조참의(禮曺參義)를 역임하였고,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또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策錄), 화산군(花山君)에 봉하 여졌다.

강경선(康景善) ()는 극재(克齋).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 하였다.

강유선(康惟善) 1520 (중종 15) 1549 (명종 4)

자는 원숙(元叔), 호는 주천(舟川), 중진(仲珍)의 손자. 1537(중종 3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고, 문장으로 송인수(宋麟壽)의 아낌을 받았다.

1545(인종 1)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하여 조광조(趙光祖)를 신원(伸寃)케 했으며,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되었다. 선산(善山)의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강희철(康希哲) ()는 함경당(涵鏡堂).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강복성(康復誠) 1550 (명종 5) 1634 (인조 12)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 유선(惟善)의 아들. 노사신(盧思愼)의 문인. 1579(선조 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참봉(參奉)사부(師傅)찰방(察訪)등을 거쳐, 김제(金堤)천안(天安)의 군수(郡守)를 지내고, 뒤에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總管)이 되었으나 광해군(光 海君)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사직하고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부평군수(富平郡守)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내고,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에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강 열(康 說) 조선조(朝鮮朝)에 학록(學錄)을 역임했다.

강교년(康喬年) ()는 수계(守溪). 조선 때 정자(正字)를 역임하였다.

강시성(康時省)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강시진(康時進) 조선(朝鮮)에서 학정(學正)을 역임하였다.

강충남(康忠男) ()는 시효(始孝), ()는 절헌(節軒). 조선에서 좌윤(佐尹)을 역임하였다.

강여즙(康汝楫) ()는 제경(濟卿). 조선조(朝鮮朝)에 공신(功臣)에 책록되었다.

강문익(康文翼)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강만수(康萬壽) ()는 죽은(竹隱).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강재산(康在山) 자는 산수(山叟), 호는 일죽(一竹). 조선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강수학(康邃學) 조선에서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강 흔(康 訢) ()는 장봉(莊峰). 어릴 때 부친(父親)을 잃고 장성한 후 추복(追服)으로 시묘(侍墓)하였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모친(母親)을 극진히 봉양햇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는 의병(義兵)을 모아 북진하다가 난이 평정(平定)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을 나라에 바쳤다. 고창(高敞) 신산사(新山祠)에 제향되었다.

강기종(康起宗) ()는 호은(湖隱), ()의 아들. 병자호란 때 부친(父親)의 명()을 받들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주(淸州)까지 나갔으나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송림산(松林山) 꼭대기에 단()을 모아 통곡하며존주음(尊周吟)음송시(吟松時)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뒤에 나라에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제수 하고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추증하였다. 고창(高敞)의 신산사(新山祠)에 제향되었다.

강효인(康孝仁)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우고 전사(戰死) 했다.

강응철(康應哲) 1562 (명종 17) 1635 (인조 13)

자는 명보(明甫), 호는 남계(南溪).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상주(尙州)를 지켰고, 후에 정기룡(鄭起龍)의 의병과 합세, 각지에서 왜병을 무찔렀다. 벼슬은 찰방(察訪)에 이르렀으나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에 분개하여 은퇴, 향리에서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상주(尙州)의 연악서원(淵岳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강우성(康遇聖)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병에게 붙잡혀 일본이 끌려간 후 10년만에 귀국, 일본어와 일본 풍속에 익숙하여 왜학훈도(倭學訓導)가 되었으며,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670(현종 11) 에 간행된 그의 첩해신어(捷解新語)1678(숙종 4) 이후부터 역과(譯科)의 왜학(倭學) 시험과목으로 사용되었다.

강승길(康承吉) ()는 연상(延祥), ()는 금호(錦湖). 조선(朝鮮)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강득유(康得維) 조선 때 교위(校尉)를 지냈다.

강후건(康厚健) ()는 배근(培根), ()는 송파(松坡). 교궁(校宮)에서 경전(經傳)을 연수(硏修)하여 그의 깊은 뚯울 관철하였고, 빈민(貧民)을 구휼하고자 사재(私財)를 들여 시혜(施惠)하였으므로 그의 송덕(頌德)이 오래도록 전한다. 81세의 고령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에 올랐다.

강용석(康用錫) ()는 경번(景蕃), ()는 이의정(二宜亭). 조선조(朝鮮朝)에 진사(進士)였다.

강용후(康用候) 자는 덕승(德承), 호는 눌헌(訥軒).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강용량(康用良) ()는 경우(慶遇), ()는 와운(臥雲). 조선조(朝鮮朝)의 학자(學者)로 학행(學行)이 뛰어나 수 차례 벼슬에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다. 사후(死後) 공조 참의(工曺參議)에 추증(追贈), 연악서원(淵岳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강만완(康萬完) ()는 안전(安全), ()는 보암(保庵).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강우량(康友諒) 조선(朝鮮) 때 예조 정랑(禮曺正郞)을 지냈다.

강치경(康致慶) 가장세전(家藏世傳) 보물(寶物)인 이태조(李太祖) 친필(親筆)의 왕지(王旨)를 영조(英祖)에게 올리니 영조가 보고 친필(親筆)로 발문(跋文)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강 규(康 逵) ()는 중홍(仲鴻), ()는 정전(井田). 학행(學行)이 탁중하여 당대의 도백(道伯)들이 수 차례 천거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다가 숭녕전(崇寧殿)과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지냈으며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自獻大夫)에 올랐다. 저서(著書)사서강설(四書講說)」․「역대편년(歷代編年)」․「역학전의고(易學傳義攷)를 남겼다.

강성필(康聖弼) ()는 황우(), ()는 법촌(法村). 효성(孝誠)과 학행(學行)이 특출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영조(英祖)가 승하(昇遐)하자 고위상(考位喪)과 같이 슬퍼하여 3년간을 북향곡배(北向哭拜)하였다.

이러한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발탁되었다.

강성호(康成浩) ()는 지완(志完), ()는 득심재(得心齋). 이재형(李載衡:교당) 의 문인. 학문(學問)예의(禮義)효행(孝行)이 탁월하였고, 저서(著書)태극집설(太極集說)」․「태연수(太衍數)」․「음양가취등설(陰陽嫁娶等說)등이 있다.

강선태(康善泰) ()는 달부(達夫), ()는 제암(濟庵). 조선(朝鮮)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강 연(康 綎) ()는 여중(汝重).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정의 현감(旌義縣監)홍주 진영장(洪州鎭營將) 겸 토포사(討捕使)를 지냈으며, 1844(헌종 10) 외국(外國)의 홍모선(洪毛船)이 내박(來泊)함에 이를 추격하여 커다란 공을 세웠다.

강대익(康大益) ()는 유익(有益), ()는 제하(濟下). 조선(朝鮮)때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여씨향약(呂氏鄕約)으로 민심을 교화(敎化)하였다.

강만식(康萬埴) 자는 사직(士直).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강이호(康履昊) 자는 의서(義瑞).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 하였다.

강이철(康履綴) ()는 맹오(孟吾).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 하였다.

강이진(康履鎭) 조선조(朝鮮朝)에 현감을 지냈다.

강재오(康在五) ()는 자경(子景).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강지빈(康智斌) ()는 사겸(四兼). ()는 경와(警窩). 조선(朝鮮)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강명길(康命吉) ()는 군석(君錫). 일찍이 군수(郡守)를 거쳐 양주목사(楊洲牧使)를 지냈으며, 의관(醫官)으로 정조(正朝) 때 전의(典醫)가 되었고, 왕명(王命)으로제중신편(濟衆新編)5()을 저술 하였다.

강성익(康聖翊) 자는 오응(五應), 호는 명재(明齋). 조선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강우진(康祐鎭) ()는 선중(宣仲), ()는 야동(冶洞). 조선조(朝鮮朝)에 방어사(防禦使)를 역임했다.

강용기(康龍基) 자는 자운(子雲). 조선에서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강홍제(康弘濟) 조선(朝鮮)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강 간(康 侃)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강성로(康聖輅)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강명길(康明吉)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강시영(康始榮) 조선조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이르렀다.

강치성(康致誠) 조선조(朝鮮朝)에 기사관(記事官)을 지냈다.

강달순(康達淳) ()는 후중(厚仲).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강학수(康鶴守)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강한송(康漢松) ()는 절보(節甫), ()는 하계(河溪). 조선(朝鮮)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강원학(康元鶴) 조선조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강인호(康仁鎬)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강홍대(康洪大) ()는 하전(荷田). 한말(韓末)에 내장원경(內藏院卿)을 지냈다.

강덕민(康德民) ()는 세화(世化), ()는 수양재(修養齋). 사친(事親)과 숭조(崇祖)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 사회의 모범(模範)이 되어, 대성문학원(大聖文學院)에서 이를 표창하였고, 경향유림(京鄕儒林)에서 사호(私號)를 문효(文孝)로 천정(薦定)하였다.

강 규(康 逵) 한말(韓末)에 덕망(德望) 높은 학자(學者)였다.

강원상(康元相) 1907(융희 1)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계획하여 3월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려다가 체포되어 공모자를 밝히라는 혹독한 심문에도 불굴, 스스로혀를 끊어 대답하지 않았다. 이해 7월 나인영전덕준(全德俊) 등과 함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강기덕(康基德) 1890 (고종 27) ?

함남 덕원(德源) 출신. 191931 운동 때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普成法律商業專門學敎:고려대학교) 학생으로 독립운동에 가담, 독립선언서 15백 장을 각 학교에 배부하고 학생간의 연락 책임을 맡았다. 그후 31 운동의 민족대표 48명의 한 사람으로 피체, 16개 월간 복역했다.

강규묵(康奎黙) 191931 운동 직후 만주에 건너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참모로서 활약햇다. 1922년 무장 항일단체(抗日團體) 의군부(義軍府)의 조직에 가담, 환인현(桓仁縣)을 중심으로 유격대를 이끌고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강성익(康性益) ()는 기삼(箕三), ()는 남주(南州). 신구학(新舊學)에 능달(能達)하였고 남제주군수(南濟州郡守)를 거쳐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濟州道知事)가 되었다. 제주고등학교 창성에 전재산을 털어 희사함으로써 후진양성(後進養成)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강용범(康用範) ()는 정하(正夏), ()는 수암(修庵). 학자(學者)로 명성을 얻었다.

강우준(康祐俊) ()는 기생(琪生), ()는 인재(仁齋). 북제주 군수(北齊州郡守)를 거쳐 제주 도지사(濟州道知事)를 지냈으며, 청렴 결백한 관리(官吏)로 훈장을 받았다.

강명옥(康明玉) ()는 영암(寧巖).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을 졸업하고 사법(司法)행정(行政) 양과(兩科)의 고등 고시에 합격, 군위의성군수(軍威義城郡守)를 거쳐 법제실장(法制室長)과 대학교(大學校) 교수(敎授)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