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회산감씨시조(檜山甘氏),감규(甘揆),회산감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8:04 수정일 : 2018-04-06 14:5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감씨(甘氏)는 본래 중국(中國) 발해(渤海) 주왕(周王)의 셋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監候)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으므로, 그 땅이름을 따서 감씨(甘氏)의 성(姓)을 삼았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감씨(甘氏)의 본관(本貫)은 회산(檜山)․합포(合浦)․거창(居昌)․창녕(昌寧)․충주(忠州)․부령(府令) 등 6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상고(詳考)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우리나라 감씨(甘氏)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임에는 틀림이 없다.

회산은 한때 의안군(義安郡)이라 하였으며, 고려 충렬왕 (忠烈王: 제25대 임금, 재위기간; 1275~1308) 때는 의창현(義昌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서기 1413년(조선 태종13)에 이웃 회원현(會原縣)과 합하여 창원부(昌原府)가 되었다.

「회산감씨대동보(檜山甘氏大同譜)」에 시조(始祖) 감규(甘揆:자는 양원, 호는 연강)는 원(元)나라 성종조(成宗朝:서기 1295~1307))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1351년 (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원나라 황족 위왕의 딸)를 배행(陪行)하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내사문하성의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15대(代) 수화(受和)에 이르기까지 본관(本貫)을 연릉(延陵)으로 삼아오다가, 16대 철(喆)이 북벌(北伐)을 간(諫)하여 중지케 한 공(功)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회산(會散)으로 삼게 되었다.

회산(會散)은 지금의 경상남도(慶尙南道) 창원(昌原)의 별칭(別稱)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6가야(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에 속했었다.

그후 신라(新羅) 경덕왕 (景德王: 제35대 임금, 재위기간; 742~765) 때 의안군(義安郡)이라 하였으며, 고려 충렬왕 (忠烈王: 제25대 임금, 재위기간; 1275~1308) 때는 의창현(義昌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서기 1413년(조선 태종13)에 이웃 회원현(會原縣)과 합하여 창원부(昌原府)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회산감씨(檜山甘氏)는 시조(始祖) 감 규(甘 揆)로부터 고려조(高麗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켜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으며, 평장사(平章事) 흥협(興鋏:시조 감 규의 손자)을 비롯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 철의(철의), 밀직제학(密直提學) 소연(紹延), 중추부사(中樞副使) 진요(震耀), 이부 시랑(吏部侍郞) 침(鍼)․전형(全形)등이 유명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회산군(檜山君) 철(喆)의 손자(孫子)로서 예부 승지(禮部承旨)를 지낸 원한(元漢)과 이조 참의(吏曺參議)에 오른 익한(益漢)형제가 뛰어났다.

특히 익한(益漢)은 1455년 (단종 3) 수양(收養)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端宗)을 노산군(魯山君)으로 봉하자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화(禍)를 입은 충신(忠臣)으로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운 경인(景仁)․경륜(景倫) 형제와 함께 가문을 더욱 빛낸 인물이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회산 감씨(檜山甘氏)는 남한에 총 2,2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회산감씨조상인물

감 기(甘 箕) 시호(諡號)는 정혜(貞慧).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 章事)를 역임하고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감흥협(甘興鋏)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감 희(甘 熙)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감철의(甘鐵顗) 고려에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감소연(甘紹延) 고려(高麗) 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감진요(甘震曜) 고려조(高麗朝)에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역임하였다.

감전형(甘全亨) 고려에서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다.

감 침(甘 鍼) 고려(高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역임했다.

감붕후(甘棚垕) 자(字)는 연(硏), 호(號)는 귀정(歸正), 시호(諡號)는 충 경(忠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감수화(甘受和) 자(字)는 인여(仁汝), 호(號)는 도은(道隱).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사복시승(司僕侍丞)에 이르 렀으며, 문장(文章)에 능(能)했다.

감 철(甘 喆) 자(字)는 선경(仙境), 호(號)는 회암(檜庵). 조선조에 북벌(北伐)을 간(諫)하여 중지케 한 공(功)으로 회산군(檜山君)에 봉해 지고 전택(田宅)을 하사받았다.

감 부(甘 阜) 자는 춘은(春殷), 호는 성재(省齋). 조선 때 사인(舍人)을 지냈다.

감원한(甘元漢) 자(字)는 대진(大振), 호(號)는 포은(浦隱). 조선(朝鮮) 때 예부 승지(禮部承旨)를 지냈다.

감익한(甘益漢) 자(字)는 도준(道俊), 호(號)는 추담(秋潭). 조선(朝鮮)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부 승지(禮部承旨)를 거쳐 이조 참의(吏曺參議)에 이르렀다. 1455년 (단종 3)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端宗)을 노산군(魯山君)에 봉하자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화(禍)를 입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감 표(甘 漂) 자(字)는 처영(處瑩). 조선 때 회산군(檜山君)에 봉(封)해졌다.

감덕팔(甘德八) 자는 내선(乃善), 호는 남계(男系). 조선 때 교수(敎授)를 지냈다.

감예종(甘禮從) 자(字)는 형숙(亨叔), 호는 자이당(自怡堂). 조선(朝鮮)때 학자(學者)로 유명(有名)하였다.

감 흔(甘 昕)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겸재(謙齋). 조선조(朝鮮朝)에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감상중(甘尙中) 조선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감경인(甘景仁) 자(字)는 여일(汝一), 호(號)는 관술정(觀術亭). 조선 선조(宣祖)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이순신(李舜臣)의 수하에서 공(功)을 세웠다.

감경륜(甘景倫) 자(字)는 여오(汝五), 호(號)는 청강(晴岡). 1591년(선조24)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웠다. 삼렬사에 제향되었다.

감경무(甘景茂) 자(字)는 희수(希秀), 호(號)는 돈암(돈庵). 조선(朝鮮)때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감경탁(甘景卓) 자(字)는 희관(睎觀), 호는 금계(禁戒).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功)을 세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무술(武術)에 뛰어났다.

감 면(甘 葂) 자는 화국(華國), 호는 수헌(守軒).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감덕후(甘德厚) 자(字)는 백원(百源), 호는 퇴은(退隱). 조선(朝鮮) 때 성균진사(成均進士)에 이르렀다.

감석초(甘碩礎) 자(字)는 주보(柱輔),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감명태(甘命泰) 자(字)는 태삼(台三), 호(號)는 우헌(愚軒). 조선(朝鮮)에서 학자(學者)로 유명(有名)하였다.

감국령(甘國笭) 자(字)는 인숙(姻叔), 호(號)는 공재(恭齋). 조선 때 효자(孝子)롤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다.

감국훤(甘國萱) 자(字)는 형달(亨達), 호(號)는 악재(惡材). 조선(朝鮮)때 학자(學者)로 후진교육(後進敎育)에 힘썼다.

감득화(甘得和) 자(字)는 상원(相元), 호(號)는 만산(滿山).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로 후진교육(後進敎育)에 힘썼다.

감수택(甘守澤) 자(字)는 춘만(春滿), 호(號)는 화헌(和軒). 조선(朝鮮)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감희두(甘熙斗) 자(字)는 주서(主書), 호(號)는 화계(花溪). 조선조(朝鮮朝)에 덕망(德望)높은 학자(學者)로 유명(有名)하였다.

감재원(甘在元) 자(字)는 치율(致律), 호(號)는 우우재(友于齋). 조선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감재규(甘在奎) 자(字)는 석우(昔友), 호(號)는 이이재(怡怡齋). 조선조(朝鮮朝)에 학자(學者)로 유명(有名)하였다.

감제엽(甘濟燁) 자(字)는 윤직(允直), 호(號)는 우강(愚岡). 조선 때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다.

감기현(甘麒鉉) 자는 영팔(英八), 호는 동미(東湄).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감제현(甘濟鉉) 자(字)는 성장(聖檣), 호(號)는 직재(直齋).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감태욱(甘泰旭) 자(字)는 덕일(德一), 호(號)는 농아(農啞). 조선(朝鮮) 때 덕망(德望)높은 학자(學者)로 유명(有名)하였다.

감태휴(甘泰烋) 자(字)는 화수(華守), 호(號)는 만성(晩惺). 조선 때 학자(學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