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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빈이씨] 이경(李 瓊)

작성일 : 2018-07-24 14:22 수정일 : 2018-07-24 14:26

(1337~?) : 자(字) 치재(穉王爭), 호(號) 이우당(二憂堂) 이정기(李挺基)의 아들이며 시조 예부(禮部)상서(尙書) 이거(李琚)의 손자(孫子)이며 운곡(耘谷) 원(元)천(天)석(錫)의 외손이다. 어려서 치악산으로 가서 외조(外祖)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수학(修學) 하고 장성하여 문정공(文正公) 신현(申賢)선생 문하에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과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여 공민왕 9년(서기 1360년)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여 정포은과 동갑(同甲), 동문(同門), 동방(同榜)으로 정의(情誼)가 더욱 깊었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을 좋아하지 않고 날마다 글만 읽었다. 공민왕 12년(서기 1363년) 조정에서 세 번이나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자 않고 이듬해 내환(母親喪)을 당했는데 이 때는 이미 상례(喪禮)가 무너지고 풍습이 퇴폐(頹廢)하여 100일 탈상(脫喪)이 이행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선생은 묘 옆에 여막(廬幕)을 치고 상례를 지켰으며 정포은이 찾아가 극찬하였다.

공민왕 16년(서기 1367년) 국가에서 성균관(成均館)을 새로 창설(創設)하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대사성(大司成), 포은(圃隱) 정몽주와 박정재가 박사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학관(學官)으로 삼았는데 선생은 성균관에 있으면서 그들과 강론(講論)하였다. 그 해 8월 선생께서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바로 사직서(辭職書)를 올렸고 이듬해 3월 화주목사(和州牧使)가 되었으나 2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산림(山林)속에 들어가 살았다.

그 후에도 정포은과 서신과 시의 교루가 있었으며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은 집에 이우당(二憂堂)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 이우당(二憂堂)은 나아가도 나라 걱정 물러나도 나라 걱정하는 분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왕 원년 서기 1375년 선생의 나이 39세에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북원(北元)의 사신(使臣)을 맏이 하려하자 정포은 선생과 10여 인이 항의(抗議)하는 상소(上訴)를 올려 북원(北元)을 섬기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가 친원파의 미움을 사서 정포은은 언양으로 나머지는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돌아왔다.

선생은 평소 시율(詩律)로 세월을 보내니 박의중(朴宜中) 황희(黃喜) 박태시(朴太始) 임선미(林先味), 길재(吉再), 이색(李穡) 등(等)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주고받은 시(詩)가 이우당(二憂堂) 실기(失氣)에 전한다.

공양왕 원년 서기 1389년 창왕(昌王)이 폐위되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두견시(杜鵑詩)를 지어 선생에게 보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감으로 차운(次韻)하여 『하늘은 어찌하여 말이 없는가 일찍 돌아갈 때는 아닌 듯 하이』(창천하적막:蒼天何寂寞 불사조귀시:不似早歸時)라고 만류(挽留)하였다. 더디어 우왕이 남쪽으로 떠나니 선생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장단(長湍)으로 가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집을 방문했다. 목은은 이별시를 지어주고 선생은 눈물로 작별하였다.

공양왕 4년(서기 1392년) 정포은이 피화되었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제문(祭文)에 죽마고우(竹馬故友) 영결핍측(永訣逼側)이란 구절이 있고 또 조만시(弔輓時)에 이르기를 『흰 무지개가 해를 뚫었음은 누구를 슬퍼함이요 선죽교 머리에 세상사가 옮겨졌내 핏자국 선명함이여 정령(精靈)이 분명하네 임자가 죽은 때가 바로 나라 망한 때로다.』(백홍관일위수비:白虹貫日爲誰悲 선죽교두세사이:善竹橋頭시국망시:人亡時是國亡時)하고 나라가 망할 것을 통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諸賢들은 부조현(不朝峴)에 제 각가 뜻을 말하고 선대의 묘를 찾아 가 소나무에 갓을 벗고 옷을 턴 뒤에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휴암(休庵) 임선미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부조현 역시 우리 임금의 땅인데 어찌하여 이내 정 강개로운가. 들판은 늙은 유민의 울음을 삼키고 골짜기는 열사(烈士)들의 명세를 깊게했네』(현역오왕토:峴亦吾王土 호위간개정:胡爲慷慨情 야탄유노곡:野呑遺老哭 동심열사맹(洞深烈士盟)이라 하고 맹호성(孟好姓)의 시에 화답(和答)하기를

『산에 올라가 산을 가르키며 묻노라.

어찌하여 부조현이 돠었느냐고,

구름은 늘 자던 굴로 돌아가고

까치는 옛 둥지에 내려안네.

지는 해에 충신은 눈물을 흘리고

윙윙 부는 바람은 열사의 시(詩)라오

천운이 이러할진데

고사리나 캐 먹다 죽는 것이 낫겠네』

등산지산문 : 登山指山問

호이불조위 : 胡以不朝爲

운귀상숙굴 : 雲歸常宿窟

작하구소지 : 鵲下舊巢枝

일낙충신루 : 日落忠臣淚

풍명열사시 : 風鳴烈士詩

천시기약차 : 天詩旣若此

불사채미기 : 不似採薇飢) 라하고 고려(高麗) 태조(太祖) 능에 가서 울면서 절하고 시를 지으니

『울면서 신문(神門) 밖을 하직하지니

그로부터 강산이 서글프네

의관이 날마다 출유(出遊)하는 곳에

추울 때 지조보인 송백(松柏)이어라

저물 역케 흘리는 외로운 신하(臣下)의 눈물

두견세는 고목(古木)가지에서 울고 있네

차라리 동해로 달려가 빠져죽을 지언정

세월(歲月) 변하는 것 차마 보지 못하겠네』

읍별신문외 : 泣別神門外

강산자차비 : 江山自此悲

의관일출지 : 衣冠日出地

송백세한시 : 松柏歲寒時

운모고신루 : 雲暮孤臣淚

작제고목지 : 鵲啼孤木枝

불여도동해 : 不如蹈東海

인견세월이 : 忍見歲月移

라 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몸을 마쳤다. 선생이 남긴 문장과 시는 이우단실기(二憂堂實記)에 수십 편이 전하고 있다.

여말(麗末) 조선조(朝鮮朝) 초에 운곡 원천석이 치악산 정상에 단(壇)을 만들어 단군(檀君), 기자(箕子) 고려(高麗)태조(太祖) 등 열성과 공민왕(恭愍王), 우왕(禑王), 창왕(昌王), 공양왕(恭讓王) 등 면혁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고려조에 충성을 하다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충신들을 매년 춘추로 제사(祭祀)를 드렸는데 여기에 선생도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운곡(耘谷)의 집에 모여 단사(壇祀)에 종참(從參)하였다. 종참기(從參記)에는 모두 80인이 기록되어 있고 이 단사(壇祀)를 변사(變祀) 또는 혁사(革祀)라고 이른다.<화해사전(華海師全)>.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 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일월 같이 밝은 절의를 오로지 지켰음은 이미 무너진 천지에 강상을 수립하고 혼란한 풍속에 하늘이 정한 떳떳한 윤리를 밝게 한 것이다. 뒤에 춘정 변계랑 선생은 선생의 화상(畵像)을 기리는 글에서

『도학의 위엄이요 덕기의 용모일세

예와 의로써 몸을 세우고

검소와 공손으로 살았네

심양(潯陽) 도연명(陶淵明)의 정절(精節)이요

동강(桐江) 엄자릉(嚴子陵)의 절개(節槪)로다.

평생의 지조는 어름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네

엄숙하고 온화한 기질은 눙서리를 능멸하는 의기였더라

따라 죽기를 이끼지 않았으니 그 정렬 천추에 빚나네

추(鄒)나라 유풍이요 노(魯)나라 학문일세

시서(詩書)를 일으키고 예악(禮樂)을 세웠네

영령이 계시는 곳 기침소리 들리는 듯

아! 사문(斯文)에 공경을 받으리』

라고 기술(記述)하였다.<이우당 실기>

조선 정조7년(서기 1783년)에 세운 표절사(表節祀)에 선생의 위패를 배향할 것을 상소한 개경의 유생들은 소문(疏文)과 관아(官衙)의 계문(啓文)이 있으며, 1932년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을 세워 배향하고,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 기동서원(基洞書院)에 포은 정몽주, 이우당 이경, 지촌 이현계, 용계 이정서 선생을 합사(合祀)하였다.

아들은 이운부(李雲富)이고 음사(蔭仕)로 천거(薦擧)되어 감역(監役)이 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내우(內憂)의 여묘(廬墓)를 마치고 두문동에 가 정릉(貞陵)을 배알(拜謁)하고 몹시 애통해 하였다. 방촌(尨村) 황희(黃喜)선생이 감탄하여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하였다. 좌찬성(左贊成) 변계량의 천거로 예(禮)조(曹)좌랑(佐郞)이 되었으나 부친(父親)의 충절(忠節)을 사모(思慕)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참고문헌 여조충열록, 규장각충열전, 조선왕조실록, 두문동서원지, 전고대방, 이우당일기 하빈이씨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