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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전씨] 전봉준(全奉準)

작성일 : 2019-07-30 11:44 수정일 : 2019-07-30 11:48

1854(철종 5)~1895(고종 32) 초명(初名)은 명숙(明淑), 별명은 녹두장군(綠豆將軍), 기창(基昶)의 아들. 전북 태인(泰仁) 출신. 아버지가 민란(民亂)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세경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고부 접주(古阜接主)가 되고 각지를 다니며 동지를 규합, 한 편 은거중인 대원군(大院君)과도 접촉하며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1892년 조병갑(趙秉甲)이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부임,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근거없는 죄명을 씌워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던 중 수세(水稅)를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해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힘에 의한 응징을 결심, 이듬해 월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로 궐기,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강탈되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반환하고 부패한 이속(吏屬)들을 감금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 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일단 농민군을 해산,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학이 심한 위에 농민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차별을 감행했다.

이에 재봉기(再蜂起)를 결의, 이 기회에 국가정치와 사회제도이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사상을 펼뜻을 굳혔다. 이해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등과 협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 동학교도를 주도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陣容)을 정비한 후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隊俉)를 편성, 동도대東徒大 將)이 되어 척왜(斥倭)․척양(拓洋), 부패 한 지배계급의 타파 등 사대강령(四大綱領)을 내새우고 부근의 군읍(郡邑)으로 진격, 관군(官軍)과 싸웠다.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대파하고 이어 부안(扶安)․정읍(井邑)․고창(固敞)․무장(戊長) 등을 장악, 4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오고 동시에 천진조약(川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탐관의 응징, 시정(施政)의 개혁, 노비이 해방 등 12개 조목의 실현을 확약 받고 일단 선유(宣諭)에 응하기로 결정하여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후 20여명의 간부를 인솔,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강화에 힘쓰는 한편 정부의 관헌들고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했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점차 조선(朝鮮)에서의 침략행위를 더해 가는 일본(日本)의 흉계에 격분, 다시 봉기했다. 9월 삼례(參禮)에서 남도 접주(南道接主)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기치를 들고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 11월의 금구(金溝)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다. 이에 수명의 동지들과 순창(淳昌)에 피신, 재기를 도모하다가 현상금을 탐낸 신현(韓信賢)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피로리(避老里)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이듬해 3월 사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