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평양조씨]수원 화성 건설의 주역 무의공 조심태

작성일 : 2017-03-18 18:12

수원 화성 건설의 주역 무의공 조심태
수원의 역사
  수원은 고구려 때는 매홀(買忽), 水成 그리고 水州로 불렸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조가 탄생하고 도읍이 한양으로 옮겨지자 수원은 한양의 남쪽 방어선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양을 방어하는 도시인 도호부로 되었다.
   18세기 말에 와서 사도세자의 무덤(永祐園)을 수원읍의 주산인 花山아래로 옮기고 수원읍을 원래자리를 떠나서 북쪽으로 약 8㎞ 떨어진 팔달산 아래로 당시200여호를 옮기게 되었으며 정조17년에는 천여호로 늘어났다. 정조 17년(1793) 수원의 새 읍치를 華城이라 명명함과 동시에 지리적으로 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개성, 강화, 화성, 광주는 중앙의 직할로 하여 경관직을 배치하는 유수부(留守府)로 왕실의 호위와 수도의 안전을 기도하였다 한다. 
수원부로
顯隆園을 遷奉
  총융사 조심태는 양주 배봉산 아래에서 사도세자의 묘소인 永祐園을 수원부 화산아래에 顯隆園 천봉은 정조가 金藤之事를 가슴에 묻고 눈물을 삼키고 목이 메인 상태에서 결심한 일을 조심태가 책임을 지고 밤낮으로 연구하고 심혈을 기우려 지성으로 이 일을 이루었다.(1789년) 이로 인하여 조심태는 정조의 신임을 얻어 1789년 수원부사로 임명되고 수원화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신도시를 관철시켰다. 수원 신도시의 市井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과 관련해 의견을 수렴하고 좋은 안을 제시하였다.
영원한 수원인 조심태(水原府使)
  그는 이후 화성성역과 둔전 설치 등 수원에 관한 모든 일을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하였다, 심지어 그는 가족까지 수원에 이주 시키는 등 모범을 보여 이에 정조는 그를 화성성역이 끝날 때 까지 전임시켜 일의 성과를 거두도록 했다. 그 한 예로 정조의 수원 화성성역(華城城役)에 대한 구상은 다음과 같다.

정조대왕이 조심태에게 내린 비밀 어찰
왕조실록 移記
정조17년-1793년 12월 6일


6일(을축)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비변사 당상 정민시(鄭民始)․ 심이지(沈頤之)․ 조심태(趙心泰)를 소견하였다.

           

                      
                                          
* 현륭원이 있는 곳은 花山이고 府는 柳川이다. 華땅을 지키는 사람이 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長壽〮〮⦁富⦁多男子)한 뜻을 취하여 이 성 이름을 화성이라 하였다 한다.        

  상이 제공에게 이르기를, “수원의 성 쌓는 역사를 경이 그곳의 留守로 있을 때 경영하다가 중간에 정승에 임명되므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다. 나는 생각하기에 10년 정도면 완공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만일 감독으로 적임자를 얻으면 어찌 꼭 10년이나 끌겠는가. 모든 일은 규모를 먼저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규모는 미리 경영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경영은 또 책임자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오늘 경들을 특별히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나무․ 돌․ 재물․ 인력․ 등에 대해서 내 생각은 국가의 경비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예컨대 금위영과 어영청 두 군영에 속한 정번군(停番軍)이 무는 돈을 가져다가 쓰면 공사간에 조금도 구애될 것이 없을듯한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본부에 관계되는 일에 반드시 국가의 경비를 쓰지 않으려는 성상의 뜻을 신들이 언제나 흠향하는 바입니다. 정번군이 무는 돈을 가져다 쓰는 것은 정말 지극히 좋겠습니다.”하였다.
  상(上)이 “정번군이 무는 돈이 몇 꿰미나 되겠느냐고” 물으니,
심태가 아뢰기를, “한 해에 2만여 냥은 될 것이니 10년을 한정하여 계산하면 25만 냥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예컨대 40, 50만 냥 정도의 재물이 있으면 넉넉히 준공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제공이 말하기를. “신의 생각에는 30만 냥이면 충분히 경영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하고, 심태는 아뢰기를,  “이 역사에 들어갈 물력을 아직 헤아릴 수없지만 신의 생각에는 30만냥을 가지고는 부족할 듯합니다.”하였다.

武毅公 趙心泰(1740~1799)
贈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知訓鍊院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資憲大夫水原府留守 兼 壯勇外使 行宮整理使

 保大定功 曰 武  剛而能斷 曰 毅
(시호 무의는 나라를 크게 보전하고 백성의 恒産에 공을 세움 굳굳하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

상(上)이 이르기를. “우선 이 액수에 따라 이리저리 애써 모아보겠지만 적임자를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누가 적합하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훈련대장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고을을 옮길 때부터 바친 공로가 이미 많았고 또 감독하는 일에도 익숙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서울에 있으면서 감독을 해야 되겠는가.? 아니면 그곳에 가 머물면서 시설하는 일을 주관해야 되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주인(主人)이 되어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자.
  상(上)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제공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사체가 중대하여 대신이 총괄해서 살피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일은 경 말고는 적임자가 없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돌 뜨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인데 돌 뜨는 곳이 고을 소재지에서 몇 리나 되는 거리에 있는가?”하니,
  심태가 아뢰기를. “바로 3리나 7리 정도의 지점인데 길이 평탄하여 운반하기가 쉽습니다.” 하고, 제공은 아뢰기를,
  “팔달산(八達山) 건너편의 지역은 읍과의 거리가 3리에 지나지 않고 석재(石材)가 많으면서도 좋아서 무진장 하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그곳의 지명이 바로 공석면(空石面)이기에 신은 항상 신명이 이를 감춰두었다가 오늘을 기다린 것은 모두가 전하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마침내 심태를 감동당상(監董堂上)으로 삼고 제공에게 총괄하여 살피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금위영과 어영청 두 군영에 딸린 번상군(番上軍)에게 10년을 한정하여 매 번(番)에 1초(哨)씩을 감해서 번서는 대신 내는 돈을 성 쌓는 역사에 쓰도록 하였다. 심태가 아뢰기를,
 “성을 쌓는 데에 대한 모든 절차를 의당 먼저 강론하여 결정해야 될 것입니다, 대략 남쪽과 북쪽은 석성(石城)으로 할 것과 동쪽과 서쪽은 토성(土城)으로 할 문제에 대해서 의논이 모아져 결정되어야만 앞으로의 공사에 지장을 받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성의 제도를 가지고 말하자면 성가퀴와 문루(門樓)는 마치 새의 날개나 수레의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하나도 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성터는 산세가 험준하지 않고 들이 평평하기 때문에 곡성(曲城)과 문루가 더욱 힘을 발휘할 것이니 대신에게 자문하소서.”
하니, 상(上)이 제공에게 물었다.
  제공이 아뢰기를, “동쪽과 서쪽도 남쪽과 북쪽의 구조에 따라 똑같이 돌로 쌓아야 되고 성이 있는데 성가퀴와 문루를 설치하지 않으면 성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上)이 심태에게 명하여 수원에 달려가서 지형을 살펴보고 그 성터를 정하게 하였다.
수원화성 성역의 경영
  (1) 화성건설과 그 의의


 
城役所座目 癸丑十二月 初八日會同干備邊司
수원화성건설은 정조와 그 개혁을 지지하는 時派들이 선택한 정권의 운명을 건 대사업이었다. 그것은 좌의정 (摠理大臣) 蔡濟恭 ․ 수원부사(監董堂上) 趙心泰 都廳에 統制使李儒敬, 水原判官 洪元燮등 시파의 관료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城圖 全篇을 편찬연구 및 실행에 도움을 주었으며, 유형원 정약용 등 실용지학과 북학의 기술까지 동원된 사업이었습니다.
화성은 1794년2월에 시작되어 1796년9월에 완성 되었으며(31개월 소요 실제공기 28개월) 화성성역 의궤에 따르면 성역 축성에 동원인력은 11,820명이고 총 873,520냥과 곡식1,500석이 소요되었고 (참고 현 시가로는 약2.5조원정도) 성곽 둘레는 약5,743m이다.
  즉 화성건설은 왕조 중흥의 사명의식, 사도세자에 대한 국왕의 효심 채제공, 조심태 등 여러 관료, 학자 예술가의 능력과 과학기술의 성과가 총동원되었다. 전국적 축성경험이나 축성방식 등 전통적인 것을 광범위하게 수용, 옹성(甕城)과 벽돌 등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북학의 성곽축성도 활용되었다. 축성작업에는 다산 정약용이 제안한 거중기 등 기기를 제작 운용하였다. 기록정신에 투철한 정조의 명으로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가 복원공사에 큰 기여를 한 바 있다.
  완성된 華城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된 평산성으로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 의 사대문을 비롯하여 暗門, 水門, 敵臺, 空心墩, 烽墩, 砲樓, 將臺, 角樓, 鋪舍, 熢墩 弩臺, 雉城등의 각급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편으로는 조선조에 3대토목공사로 한양도성, 화성축조, 대원군시대 경복궁 중건등을 들 수 있다. 특기사항은 부역대신 임금지불하는 성과급방식을 적용하고 성곽설계와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패스트 트레킹(fast tracking)방식은 공기를 단축시키고 공사 실명제를 도입하여 우수한 품질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다한 비용과 공사기간 중 흉년에 진휼의 정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노론 벽파의 반대도 심하였으며 일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2) 농⦁상업도시로 발전
  수원화성 신도시건설에 인구가 번창하고 상업도시로 성장하는 데는 수원부사 조심태의 의견에 따라 새로운 읍치에 상권부양책으로 장사를 장려하여 이자가 없는 돈 6만량을 3년 동안 기한으로 市井 장사치에 풀어 물산장려책으로 戶戶富貴 人人和樂토록 유도하여 도시가 활력을 얻게 되었다. 즉 조심태는 새로운 읍치를 조성함에 있어 시전(市廛)을 설치하여 모자와 삼(蔘)의 일부 독점적 거래권 인정 등 상업을 활성화 시키는 기초안을 제시 시행하였다. 또한 농업발전을 위하여 관개사업으로 만석거(萬石渠)와 넓은 농토인 대유둔(大有屯) 등을 조성하였고, 아름다운 도시환경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3) 장용영 설치
  장용영을 직접적으로는 화성성곽, 화성행궁, 현륭원을 수행하고 거의 6,200여명이 동원되는 원행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간접적으로는 화성축조를 계기로 정조의 친위군영으로서 기존의 중앙군영을 훨씬 능가하는 정예의 군사력을 확보 왕권강화정책과 이를 뒷받침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장용영은 內營(궁궐)과 外營(화성)으로 조직하고 조심태는 8대 장용대장에 임명되어(1798.2.8.)그의 군제개혁과 도식 등 관련된 주요정책 대부분이 받아들여졌으며 화성 외영에서 군사훈련을 주도하였다.
* 外營 설치: 1793년 수원도호부를 승격시키면서 화성유수부에 장용영 外營을 설치 주둔.

儀軌座目  丙辰九月十六日會同 干華城府

(4) 정조화성행차의 정치적 의의
  ➀ 현륭원 방문
 1795년의 행차에는 현륭원 참배와 어머니 혜경궁 회갑연을 열었다. 이는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고 신민의 충성을 집결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➁ 국방의 재정적 후원 으로서도 자리매김 하였다. ➂ 민의 상달(上達)의 정치를 실시하였다

성성역 의궤의 편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 2007.6.)

   우리 조상들의 기록정신은 경탄을 자아낸다. 국가의 주요행사가 끝나면 儀軌의 형태로 기록보존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례였다. 1796년 9월에 華城城役이 끝나자 그해 9월16일 華城府에서 水原留守 趙心泰, 都廳 統制使 李儒敬 掌樂院正 洪元燮 트리오와 畵師 嚴致郁 등이 회합을 갖고 의궤 편찬에 들어가 그해 11월9일에 완성되어 필사본(彩色圖 포함)을 정조에게 바쳤으며 10부 정도를 간행하고 1800년 5월28일에 監印座目에 直提學 李晩秀등으로 구성되어 다음해 9월에 整理字本(금속활자)으로 간행되었으며 卷首 1권, 原編 6권 附編 3권 합10권 9책으로 구성되었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공사준공조서>로서 준공도와 인원 및 물자의 정산내역이 정확하고 세밀히 기록되어 국가조직관리능력의 치밀성을 보여준다.
  부기할 점은 華城記蹟碑(金鍾秀 撰)는 당시에는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화성 성역은 정조대왕의 망극한 효심을 받들어 봉행한 다음 세 사람의 신명을 다 바친 결과물임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같이 가슴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 正祖大王 (조선 22대 國王 1752~1800 : 在位1776~1800) - 정조는 선비이며 문무겸전한 통유이다. 정치에서는 권모술수를 아우르는 통큰정치를 한 軍師였다. 홍제전서(弘濟全書)문집을 남긴 학자군주이며 세종에게는 훈민정음이 있었다면 정조에게는 화성축성이 있다. 그의 自號는 萬川明月主人翁 (달을 비추는 개울은 만개지만 밝은 달은 하나)이기도하다.
 홍제전서는 180권 100책 10강의 방대한 저서이다. 우리역사의 정조시대는 “왕조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 “정치정의에 힘쓴 탕평의   시대” 또는 “조선조의 르네상스”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성왕을 자처하는 그는 경장(更張)의 준비만하고 과감한 정치적 모험을 못한 미완의 개혁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 樊巖 蔡濟恭 (1720~1799)
     文科(1789) 호 : 번암,  시호 : 문숙공(文肅公) 규장각제학, 국조보감찬수,의정에 참여하여 獨相으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성성역에 당시75세의 노령으로 摠理大臣으로 참여하였다. 특별히 영조는 임종시에 어린 세손 정조에게 명하여 기무(機務)를 대청(代聽)하게 하고 그에게 군권을 쥐어주며 충성스런 신하인 채제공에게 세손의 안위를 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 武毅公  趙心泰 (1740~1799) 武科(1768년)  시호 : 무의공 (保大定功曰武, 弘而能斷曰毅) 兵使, 통제사, 수원부사, 유수, 監董堂上, 어영대장, 장용대장, 句管堂上.(忠良子孫=忠臣 趙廷翼의 後孫) 판윤, 형판, 증좌찬성, 특별히 정조가 초기 불안정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 관계로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하여 13년이 지나서야 안정되어 지지세력이 다져진 시기에 금등사(金藤事)를 묶어둔 상태에서 눈물을 삼키고 목메인 가운데 현릉원으로 천봉을 실행하는 처리를 완벽하게 이루어낸 조심태를 각별히 신임하게 되었다.

또한 정조로부터 화성축성에 따른 포상으로 반숙마 1필(1795. 윤2월),구마(廐馬)(1796.1),정헌대부加資 (1796.9), 전지와 노비(1797.1)등이 있었다. 그는 수원을 병•농•정(兵•農•政)의 복합도시로 발전시켰다.

 * 茶山  丁若鏞 (1758~1816)
     文科(1789년) 호 : 다산,   시호 : 文康公(1910) 승지, 찰방, 부사역임 18년간(1801~1818)유배생활.그는 1792년 條陣城制(尹耕의保約,柳成龍의 城說),北學의 성과로 奇器圖說등 서적을 토대로 중국의 과학기술이 연구되어 起重架圖說을 정조에게 바쳤으며 을묘원행(乙卯園幸)시에 한강舟橋 설치에 공이 컸다. 또한 위대한 대저술가로 與猶堂全書(經集232권, 목민심서 등 270여권)을 저술한 實學者이다.

수원의 역사
  수원은 고구려 때는 매홀(買忽), 水成 그리고 水州로 불렸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조가 탄생하고 도읍이 한양으로 옮겨지자 수원은 한양의 남쪽 방어선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양을 방어하는 도시인 도호부로 되었다.
   18세기 말에 와서 사도세자의 무덤(永祐園)을 수원읍의 주산인 花山아래로 옮기고 수원읍을 원래자리를 떠나서 북쪽으로 약 8㎞ 떨어진 팔달산 아래로 당시200여호를 옮기게 되었으며 정조17년에는 천여호로 늘어났다. 정조 17년(1793) 수원의 새 읍치를 華城이라 명명함과 동시에 지리적으로 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개성, 강화, 화성, 광주는 중앙의 직할로 하여 경관직을 배치하는 유수부(留守府)로 왕실의 호위와 수도의 안전을 기도하였다 한다. 
수원부로
顯隆園을 遷奉
  총융사 조심태는 양주 배봉산 아래에서 사도세자의 묘소인 永祐園을 수원부 화산아래에 顯隆園 천봉은 정조가 金藤之事를 가슴에 묻고 눈물을 삼키고 목이 메인 상태에서 결심한 일을 조심태가 책임을 지고 밤낮으로 연구하고 심혈을 기우려 지성으로 이 일을 이루었다.(1789년) 이로 인하여 조심태는 정조의 신임을 얻어 1789년 수원부사로 임명되고 수원화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신도시를 관철시켰다. 수원 신도시의 市井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과 관련해 의견을 수렴하고 좋은 안을 제시하였다.
영원한 수원인 조심태(水原府使)
  그는 이후 화성성역과 둔전 설치 등 수원에 관한 모든 일을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하였다, 심지어 그는 가족까지 수원에 이주 시키는 등 모범을 보여 이에 정조는 그를 화성성역이 끝날 때 까지 전임시켜 일의 성과를 거두도록 했다. 그 한 예로 정조의 수원 화성성역(華城城役)에 대한 구상은 다음과 같다.

정조대왕이 조심태에게 내린 비밀 어찰
왕조실록 移記
정조17년-1793년 12월 6일


6일(을축)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비변사 당상 정민시(鄭民始)․ 심이지(沈頤之)․ 조심태(趙心泰)를 소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