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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문화
박정하 조회수:102 223.131.18.213
2020-09-22 07:09:21

성씨(姓氏)와 성씨문화(한국, 북한, 몽골, 일본)

1, 우리나라의 성씨 유래

역사상 우리나라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신라 하대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無姓層)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 화척(禾尺;천업에 종사하던 무리), 향·소·부곡민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존속한 특수한 지방하급 행정구획천민집단촌의 사람), 역·진민( 고려시대 여관 및 숙박업과 나루터에서 종사하던 사람)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은 그만큼 많았다. 16세기 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갖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당시 사회계층을 크게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눌 때, 양반층은 일찍이 군현토성에서 귀족과 관인을 배출한 사족(士族) 가문이며, 중인층은 군현과 임내의 이족(吏族)에서 서리·기술직을 맡은 계층으로 양반의 서얼 출신이 여기에 해당된다. 상민층은 고려 이래 관인을 내지 못한 일반 농민층으로서 향·소·부곡(鄕,所,部曲)성 출신이 많았다.

천민은 대체로 무성층이었다. 최하층인 이들은 조선 후기 300년간에 걸쳐 점차적인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되며 성의 대중화가 촉진되었고,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는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갖게끔 법제화되었다.

우리의 성씨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무엇보다 일제 말기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겠다. 이는 대륙침략과 미일전쟁을 전개하던 일제의 발악적인 마지막 식민통치 수단으로, 이른바 그들이 부르짖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의 일환으로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인 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한 일이다.

이러한 일본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서양자(婿養子) 제도와 함께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군정의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공포되며 일제하의 창씨개명으로 인한 일본식 씨명(氏名)은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

한편, 우리 성의 수는 성씨관계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250여개의 성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다.

1486년(성종 17)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성과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망성 포함)를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되었다.

영조 때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 陶谷叢說≫에는 298성이 나오는 데 비하여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모든 성을 거의 망라하였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한성화 이전의 고유명자(固有名字)와 이미 소멸된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후대까지 존속된 성수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그러한 사실은 193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198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된다.

 

2, 성씨종중

문중(門中)은 가문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해서 같은 성씨를 가진 한집안을 말한다.

예로부터 음력 10월 상달에는 문중의 조상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는데 이 제사를 시제(時祭, 時祀, 時享祭)라한다. 직계조상이 아니더라도 아주 윗대 조상의 묘소를 찾아서 제사를 올린다. 숭조여천(崇祖如天)이란 말이 있다. 조상숭배하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말이다. 옛말이지만 오늘에도 이런 정신을 강조하면서 조상묘에 제사를 올리는 문중이 많다.

문중은 성이 같고 본관이 같은 피붙이가 모인 것을 말 한다. 즉 혈족의 모임이다. 문중은 종중(宗中)이라고도 하는데 한 성씨 본관에도 지역별로, 파별로 여러 갈레가 나눠진다. 그래서 대문중이 있고 파문중이 있고 소문중도 있다. 대문중은 같은 성씨 전부가 포함되지만 파문중은 중시조 중심으로 다시 나눠지며 소문중은 한 지역의 입향조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 다. 시제는 대문중 시제도 있고 파문중 시제도 있고 소문중 시제도 있다.

 

3, 북한의 성씨문화

북한에서는 가족을 넘어 서는 친족이나 문중의식이 없다고 본다

우선 가족 외에 가까운 친족이나 친척은 알고 있겠지만. 그러나 8촌이 넘어가는 친족이나 문중은 있기 어렵다. 사회주의 제도 하에서 동족부락이 없어지고 6. 25전쟁 이후에는 주민 분류정책에 따라 거주지 이동이 많았기에 그렇다. 하지만 족보를 알게 되면 친족이나 문중개념은 막연하나마 가지게 될 것이다. 북한에서는 문중이란 말보다 가문이란 말을 더 내세운다.

북한가족법에서는 8촌까지의 혈족, 4촌까지의 인척 사이에는 결혼할 수 없다고 돼있다. 그러니까 8촌 이내를 친족으로 보고 혼인으로 맺어진 4촌 이내를 인척으로 본다는 것이다 친족과 인척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민법상 친척집안 모두를 통칭해서 친족이라 하는데 북한에서는 같은 혈족만 친족이라 하는 점이 다르다.

북한에서는 제사를 지내도 부모제사에 국한하고 4촌 이내의 친족도 제사 때문에 모일 일이 없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니 문중단위 제사가 있을 수 없다. 무엇보다 문중단위의 공유재산이 없으니 조상제사를 문중단위로 지낼 수가 없을 것이다. 같은 성씨의 먼 윗대조상을 문중에서 찾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북한에서는 '봉건적 제도'라는 이유로 본관(本貫; 성(姓) 앞에 붙는 이름(예: 고령 박씨)을 철폐하고 사용하지 않는다. 우선 봉건잔재의 철폐라는 이유를 내세워서 본관을 폐지했고 남한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과 이촌향도의 영향으로 대규모 인구이동이 이어졌으며 또한 종친회처럼 무리를 짓는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 정치적 행위로 간주해 엄하게 처벌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본관이 철폐되었다 해도 북한 주민들이 자신의 본관을 싹 잊어버린 것은 아닌 만큼 자신의 본관이 어디인지 아는 경우 정도는 많았지만. 세대가 교체될수록 기억이 희미해져서 젊은 층은 자기의 본관이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자기 본관을 모르는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오게 되어 주민등록상 본관을 신고해야 할 때는 그 성씨에 해당하는 여러 본관들을 보여주고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고 한다. 본관이 실질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데도 굳이 남한 주민등록상에 반드시 본관을 등록하게 하는데, 대한민국 국민인데 성은 있으나 본관이 없다면 위화감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18년 기준, 북한에서 성씨와 본(본관)을 밝히는 스마트폰 앱이 나왔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는데 이를 보면 북한에서도 족보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도 최근 성씨와 본을 밝히는 프로그램이 나와서 북한주민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성씨와 본을 밝힌다는 것은 한 성씨의 문중도 밝힌다는 것이 되겠기에. 앞으로 북한에서도 먼 장래에 성씨문화의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

 

4, 몽골의 성씨제도

몽골, 아버지 이름이 자식의 성이 되는 대혼란`

1925년 소련이 가부장적 성씨 제도 파괴

2대만 지나면 뿌리찾기 안돼 근친혼 심각

 

특이하게도 몽골인에게는 성이 없다. 아버지의 이름이 자식의 성이 돤다. 예를 들어 ‘후영’이 사내 녀석을 낳아 ‘상용’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면, 그 아들의 성은 후영, 이름은 ‘상용’이 된다. 풀 네임은 ‘후영의 상용’이라고 쓴다. 만약 후영이 손녀 ‘성연’을 낳았다면, 그 손녀의 성은 후영, 이름은 성연이며 풀 네임은 ‘후영의 성연’이 된다. 한 대만 건너뛰어도 할아버지의 이름은 남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사촌 정도만 돼도 서로 친척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없고, 친가와 외가도 헷갈리게 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생기는 가장 위험한 현상이 바로 근친혼이다.

몽골이 인구비율에 비해 신경정신 질환자가 많은 까닭, 혹은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 까닭을 여기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몽골인은 원래 가문과 집안 개념도 없는 천하의 오랑캐였을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몽골인은 한국인 보다 훨씬 진한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 민족애가 폭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몽골인이 세계의 절반 가까이를 빠른 시간에 정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왕과 장군에게도 ‘형님’ ‘너’라고 부를 수 있는 가족적 위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칭기스칸의 군사는 아군이 한명이라도 전사할 경우, 혈족의 희생에 대한 피의 보복으로 엄청난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가족애의 편린은 지금도 남아 있다. 상점이나 식당의 점원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 ‘누나’ ‘형님’ ‘동생’ 등이고, 시장에서 나이 지긋한 상인들은 젊은 소비자에게 ‘동생아’ ‘아들아’하고 부르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한다.

 

아무튼 몽골에도 20세기 초반까지 한국의 김ㆍ이ㆍ박 씨와 같은 성이 있었다. 성은 부족과 출신 지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몽골이 독립 혁명을 했던 1921년 당시에도 이 같은 성이 있었다고 한다.

몽골인의 성을 없앤 나라는 바로 혁명을 도운 소련이었다. 그 옛날 모스크바까지 유린했던 식민지 건설자 후손들의 기상과 기백을 가장 효율적으로, 철저하게 꺾을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다. 소련인들은1925년 몽골인에게 성씨 제도 개혁을 종용했다. 그 결과 지금 같은 성씨 제도(아버지 이름이 성이 되는 )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몽골인의 가족적인 단합과 기상을 꺾겠다는 소련의 의도가 약 70년간에 걸쳐 차곡차곡 쌓인 셈이다. 사실 몽골어에도 고모, 이모, 형부, 올케 등 친척을 호칭하는 단어가 다수 있었지만 요즘엔 역사학자 외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단다. 근친혼의 폐해도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민주화 혁명이후 4~5년 전부터 몽골서도 성 되찾기 운동이 한참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몽골 민주화 혁명 이후, 러시아의 영향을 벗어나 자신들의 성을 되찾아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 차츰 그 여론이 확산되는 중이다. 또 2000년 초에는 울란바타르 주민을 대상으로 새로 성을 되찾아 신고토록 했다고 하는데, 뜻밖에도 실적은 아주 미미했다고 한다. 성을 되찾고는 싶었지만, 친가와 외가 중 하나의 성이라도 기억하고 있는 집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70년 정도의 시차를 거슬러 자신의 성씨를 되살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벌써 두 세대 이상 멀어지면 사촌간도 구별을 못하는 처지에 이름을 물어물어, 고향까지 되찾아가 확인을 하기엔 너무 늦은 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생업이 너무도 척박했으므로. 그럴 여유도 없고, 그냥 이대로 쓰자는 중론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5,일본 성씨의 유래

모든 사람이 성을 갖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원래 한국이나 일본에서 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귀족 계급이나 왕족에 한정되었으며 평민들은 성을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794~1185) 후반에 귀족이나 무사들을 중심으로 성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그 성이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게 되었다  한때 농민들도 성을 갖게 되었지만 가마쿠라 막부시대가 되면 성의 개념이 특권으로 의식되어 막부는 농민들이 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이후 막부의 힘이 약화되어 농민도 무사에 영향력을 지니게 되어 무사 중에는 자신의 성을 농민에게 주는 경우도 있었다  성이라는 것은 이처럼 출신을 같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집(家)을 구별하는 명칭으로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후 성은 다시 평민들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에도시대(1603~1867)에 특권계급은 이미 1만 정도의 성을 보유했다고 하며 이 시대에 평민들 사이에서도 비공식적으로는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이후 일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성의 사용이 허용된 것은 막부 말기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을 때로서 메이지 신정부가 진행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지금까지의 특권이었던 성을 어떠한 위치에 놓을까 하는 논의가 일어나 국민 전체를 파악해야 하는 필요성과 호적 편성의 필요성도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성을 갖도록 하게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1870년(메이지 3년)의 <평민 성 허가령>, 1871년의 <호적법> 제정 등의 몇 과정이 있게 된다  이로써 에도시대에 1만에 이르던 성은 10만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국이 300 여종의 성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꽤 많은데 일본은 세계에서도 성씨가 가장 많은 나라로 알려졌다  평민이 성을 새로이 붙이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에도시대부터 성을 허락받아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 지방의 유지에게 자신의 성을 부탁하는 방법, 자신이 고안해 내는 방법 등이 있었다  이때에 그들은 지명, 지형 경관, 방위 위치 관계, 직업, 후지와라 가문에서 유래된 것 등을 사용했다 

일본의 성씨 중에는 지형 경관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성씨가 많다.

木下(기노시타) - 나무밑 ,山本(야마모토) - 산 속,竹田(다케다) - 대나무 밭

大竹(오타케) - 큰 대나무, 太田(오타) -콩밭, 村井(무라이) - 동네 우물

山野(야마노) - 산과 들판, 川邊(가와베) - 개천 가

森永(모리나가) - 숲속, 麥田(무기타) - 보리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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